비가 내리기 전과 후, 그러니까 습한 시기가 오면 분리수거장에 놓인 종이 박스는 습기를 가장 빨리 받아들인다. 깔끔하게 접어놓은 박스나 신문지라면 별 걱정을 할 것도 없지만, 녀석들을 한데 곱게 담아놓기 위해 본래 모습으로 둔 박스는 순식간에 흐물흐물해져버린다. 가끔 무심한 손이 오가면 구겨지는 건 시간 문제가 되버리기도. 지나가는 비에도 쉽게 젖어들어가는 건 종이의 성질이라 금세 눅눅해지는데 말라가는 건 어떤 것들보다 늦장을 부려 모진 날씨에 묵묵히 버티기엔 영 수월하지가 않다. 구겨짐이란 어쩔 수 없는 종이의 숙명이라 여기곤 하지만 젖은 몸보다 젖어버린 뒤 초라해지는 마음이 더 문제일테다.
구겨진 종이 박스는 우리의 일상을 반영한다. 어떤 순간의 감정을 담아내기도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물건이 머무르기도 한다. 마른 날에는 어떤 물건이든 탄탄하게 담아 든든할 때가 많지만 종이 박스는 또한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다. 너무나도 취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분리 수거장 한 쪽에 놓인 종이 박스를 한참이나 바라본다. 그리고 면면에 생긴 주름 하나하나가 인생의 상처와 아픔을 닮아있음을 생각해본다. 우리는 종종 실패와 실망으로 인해 굳어지고, 부러지기 쉬운 존재가 된다. 우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강한 외투를 입고 살아가지만, 그 안에서는 종이 박스처럼 쉽게 꺾이고 상처를 입곤 한다. 하지만 구겨진 종이 박스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해본다. 종이 박스가 생각보다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것을 보며 우리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더라도, 우리는 결코 꺾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게 개인의 의지이든 주변 환경의 도움이든 말이다. 가벼이 보고 지나칠 수 있는 종이 박스이지만 우리 자신을 투영해본다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를 일이다.
구겨지거나 때론 버림받았다 여겨져도 쉽게 꺾이지 않는 강인한 존재로 우리는 언제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종이 박스를 통해 깨닫는다. 우리는 삶의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며 구겨지고 상처를 입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강인함과 인내심을 길러내고 삶의 주름에 의지하여 더 강해지고 더 나은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