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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씀 Dec 15. 2023

도라지차

평소 같았다면 분주히 움직이는 이들의 목소리, 발걸음이 이 시간을 채웠을 텐데, 온종일 비 예보가 잡힌 오늘 같은 날엔 빗방울이 쉴 새 없이 창문을 두드린다. 비 마중을 가볼까 하다가 몇 걸음 못 떼고 젖어들어갈 바지 밑단이 염려스러워 생각을 접는다. 이런 날엔 응당 젖어 들어가는 게 자연스러운 건데도 영 내키지가 않는다. 젖은 채로 오들 오들 떨다보면 이내 꼬르륵거리며 속에서 따뜻한 걸 원하기 마련이거든. 


머그컵에 온수를 받아 티백 아무거나 보이는대로 뜯어 푹 담가둔다. 향긋함 끝에 쓴 내음이 올라오는 걸 보니 도라지 차인가 보다. 어느 가수의 노랫말에 등장했던 도라지 위스키의 진함은 아니지만, 일단 도라지를 우려내 마실 수 있으니 기분이라도 내본다. 


도라지차를 마시고 있노라면 그 언젠가 들렀던 시골 다방이 생각난다.




그 시골 다방에는 엄마와 싸우고 가출한 김양, 무작정 길을 나섰다가 앉아서 돈을 벌 수 있단 말에 혹해서 온 박양이 있었다. 성냥개비를 얼개설개 얹어 탑을 만들고 있노라면, 김양은 자기도 해보겠노라며 어설프게 건드렸다가 무너뜨리기 일쑤였다. 박양은 쟤 또 저런다며 단골 손님에게 일러바치곤 했는데, 둘을 보고 있노라면 천진난만한 애들 같았다. 


비가 오면 김양은 울적해했고, 박양은 공쳤다며 담배를 연거푸 피워댔다. 둘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비가 와서 옛 생각이 난 건지. 마냥 천진난만하게 본인들의 감정에 솔직했던 건지. 마담은 그 둘에게 채근을 하기도 다독이기도 했는데, 비가 오는 날엔 손님 받으라는 채근 없이 오징어 하나를 구워다 질겅질겅 씹으면서 가계부를 정리하곤 했다. 벼농사 짓는 오씨, 지물포 운영하는 최씨, 세탁소 운영하는 김씨에게 전화를 해서는 쌍화차랑 커피 값이 밀렸으니 다음에 올 땐 정리해야 한다고 신신당부 하곤 했다.




날이 개면 김양은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나가곤 했는데 커피를 시키는 이들이 다들 속내가 거기서 거기라 배달을 다녀오면 시무룩하거나 씩씩거렸다. 그 집엔 다시 배달 안 갈 거라며 마담에게 으름장을 놓곤 했지만, 어찌 저찌 달래서 또 다녀오고 씩씩거리기를 반복했었다.


앉아서 돈 벌 수 있다고 온 박양은 말 그대로 앉아있기만 했다. 홀에 손님이 오면 옆에서 커피나 차를 따라주고 맞장구를 쳐주곤 했는데, 어떤 날은 기계적으로 네에~만 반복하다가 손님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차라리 낫겠다며. 그런 날엔 박양은 터벅터벅 동네를 걸어다녔다. 꽃도 보고 하늘도 보고 벤치에 드러누워 담배도 피우고. 


김양과 박양은 도라지 차를 좋아했다. 인생을 닮은 거 같다며. 향은 참 좋은데 맛이 쓴 게 꼭 우리같지 않냐며 한참을 깔깔거렸는데, 웃음 끝엔 꼭 눈물이 맺혔었다. 신세 한탄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도라지차가 써서였을까. 




비가 계속 내린다. 도라지차는 어느새 식어버렸고 쓴 맛이 혀끝을 맴돌고 있다. 겨울비는 이렇게 무심하게 내리는데 사람 마음은 영 정처없이 흔들리고 있다. 현재에 머무르지 못하고 마냥 과거로. 언제였을지도 모를 과거로. 김양과 박양은 아직 그 시골 다방에서 재잘거리고 있을까. 비가 개면 김양은 오토바이를 신나게 몰고 배달을 갈 거고, 박양은 같은 대답을 하면서 가끔 성냥개비 탑을 쌓는 손님이 오면 옆에서 같이 쌓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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