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엽기적인 그녀] 리뷰
2001년 여름, [엽기적인 그녀]는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을 비틀며 세상에 등장했다. 당시 ‘엽기’라는 단어는 기묘하고 파격적인 무언가를 지칭하는 신조어로, 젊은 세대의 말과 행동을 설명하는 유행어였다. 영화는 그 시대의 공기를 가볍게 붙잡는 듯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청춘의 고백이 담겨 있었다.
‘그녀’라는 이름 없는 존재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하게 다가오는 건, 주인공 ‘그녀’다. 이름조차 불리지 않고, 그저 ‘그녀’라 불리며 서사의 중심에 서 있다. 그러나 그 익명성은 부재가 아니라 힘이다. 그녀는 기존의 여성 캐릭터처럼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는다. 오히려 공격적으로 개입하고, 통제하려 들며, 자기 감정을 숨김없이 쏟아낸다. 술 취한 채 전철에 쓰러지고, 남자 주인공을 함부로 대하고, 때로는 가학적으로 보일 만큼 거침없는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그 속에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와 깊은 외로움이 숨어 있다.
이 ‘엽기적’인 행동은 단순한 코미디적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당시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게 부여되던 역할을 거부하는 신호처럼 읽힌다. 그녀는 낯설고 불편하지만 동시에 자유롭고 매혹적이다. 이는 2000년대 초반, 한국 대중문화 속에서 여성상이 변화하기 시작한 전환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랑의 불합리함을 껴안다
[엽기적인 그녀]는 전형적인 사랑 이야기의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잘 맞는 연인이 아니다. 서로 오해하고 충돌하고, 때로는 폭력에 가까운 농담과 행동으로 마음을 확인한다. 그러나 이 불완전한 과정을 통해, 영화는 오히려 사랑이란 언제나 합리적인 계산이나 부드러운 조율로만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시간과 운명의 개입이다. 편지와 약속, 그리고 기다림의 모티프가 결말까지 이어진다. 여기서 사랑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비로소 자리를 찾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단순한 청춘 로맨스가 아니라, ‘사랑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청춘의 기록, 그리고 오늘의 우리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보는 건 단순한 향수 여행이 아니다. 스마트폰과 SNS가 연애의 전형이 되어버린 오늘, [엽기적인 그녀] 속의 만남은 지나치게 낯설게 보인다. 그러나 낯섦 속에서 되레 익숙한 감정이 피어난다. 상대를 이해하지 못해 갈팡질팡하는 서투름, 뜻하지 않은 행동에 상처받으면서도 결국 다시 다가가고 마는 끌림. 이것이야말로 청춘의 본질이 아닐까.
20여 년이 흘렀지만, 영화가 여전히 회자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랑의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냈다는 점. 웃음과 눈물 사이에서 흔들리던 그 감정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엽기적인 그녀]는 엽기적이고 기묘한 러브스토리라기보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서로에게 다가가던 한 시대의 청춘 기록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여전히 묻는다.
사랑이란 무엇으로 기억되고,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