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기 전 공기는 분명히 달라진다. 흙 속에 숨어 있던 냄새가 천천히 올라오고 바람은 그 냄새를 흩어 보낸다. 사람들은 그것을 비 냄새라 부르지만 사실은 땅과 풀과 먼지와 공기가 오랜 시간 부딪히며 빚어낸 기척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오래된 신호다.
그 냄새를 맡으면 몸이 먼저 기억한다. 교실 창가에서 빗줄기를 훔쳐보던 장마철의 오후와 운동장 위 흙먼지가 눅눅하게 가라앉던 풍경, 땀에 젖은 셔츠가 등에 달라붙던 여름날과 우산을 써도 젖어버린 신발 속의 축축한 감각. 이 모든 장면은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다. 오래전 난로에 손을 대고 남은 화상처럼 선명한 자국으로 남아 있다. 비 냄새는 그 기억들을 한꺼번에 깨워내며 잊고 있던 나의 과거와 맞닥뜨리게 한다.
비 냄새가 감도는 순간 나는 곧 무너질 듯한 하늘의 문턱에 서 있는 기분이 된다. 발밑은 아직 마른 흙이지만 공기에는 이미 물의 기운이 차오른다. 마치 거대한 수족관 앞에 선 사람처럼 눈앞에서 일렁이는 물결을 바라보고 그 속을 유영하는 시간의 조각들을 본다. 과거와 미래가 얇은 막을 사이에 두고 스며드는 듯 맞닿아 있다. 그래서 비 냄새를 맡을 때마다 오래된 기억과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동시에 겹쳐진다. 흙이 물을 머금듯 마음 또한 천천히 젖어 들어가며 그 무게 속에서 묵직한 투명함을 얻는다.
비는 곧 쏟아진다. 그러나 비 냄새는 그 직전의 짧은 틈에만 머문다. 흙과 하늘이 맞닿으며 전해주는 작은 신호, 다가올 풍경을 미리 알려주는 예감. 그 순간 나는 오래된 장면 속에서 멈추어 서고,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이 겹쳐지는 자리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 사이에서 맡는 냄새는 금세 사라지지만 사라지기 때문에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비가 그치고 나면 연잎마다 맑은 물방울이 고인다. 작은 진주처럼 반짝이는 물방울은 곧 흘러내리지만 흘러내린 자리마다 더 푸른 빛을 남긴다. 산자락은 안개를 머금고 고요히 눕고 기와지붕은 젖은 흙 냄새를 품은 채 묵묵히 서 있다. 비가 그쳐도 기척은 풍경 속에 머물며 오래도록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