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은 하늘 가까이에서 먹고 살지만
잠은 늘 가장 낮은 곳에 남긴다
물을 마실 때면 다리를 벌려
스스로를 무너뜨린 자세로
세상 앞에 선다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살기 위해선 고개를 꺾는 법을 배웠다
높다는 건 늘 안전하다는 뜻이 아니고
멀리 본다는 건 늘 먼저 아는 일도 아니란 걸
기린은 태어난 후 몸으로 배웠다
기린의 심장은 머리까지 피를 올리기 위해
두 번 생각하고 세 번 버틴다
그래서 쉽게 뛰지 않고
도망칠 때조차 품위를 잃지 않는다
그럼에도
기린은 그 자세를 포기하지 않는다
살아 있음은
늘 한 번쯤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이어서
사람도 그렇다
높이 서 있을수록 자주 굽혀야 하고
많이 버틸수록 말은 줄어든다
나는 아직
다리를 벌린 채
물을 마시는 중이다
누군가의 시선보다
내가 살아야 할 방향을 더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