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광등이 깜빡깜빡한다 싶더니 결국엔 정전이다
하필이면 이럴 때 정전이라니
촛불이라도 켜야겠다 싶어
어림 짐작으로 부엌 방향으로 더듬어 가는데
가던 도중 밥상에 종아리를 까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눈 뜬 장님이 되어 더듬거리며 부엌 찬장을 열어 젖힌 뒤
팔을 쭉 내밀어 구석에 쳐박혀 있던 양초 두개를 꺼낸다
정전이라는 건 아주 마른 날이거나 아주 진 날에 꼭 찾아오는 법
오늘은 그나마 다행인 조금은 진 날이라 더위 걱정은 접어둔다
초에 불을 붙여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
냉장고 생각이 퍼뜩 나버려 초 하나를 들고 냉장고로 향한다
한데 모여있던 반찬통들은 오들오들 떨다 벌컥 열린 냉장고 문밖을 바라보다
얼어있던 몸을 일으켜 힘껏 기지개를 켠다
코드가 뽑힌 냉장고의 한기는 이제 온데간데 없이 온기가 차오르는데
깜빡 잊어버린 건지 전기가 들어올 생각을 않는다
흔하다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돌이켜보게 하는 시간
그리고 스쳐지나 잊었던 모든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시간
정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