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모습과 지난 시간들을 떠올리며.
어릴 적, 사람들은 나에게 말했다.
느이 아버지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걸.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던 아버지는 IMF라는 거인에게 부질없이 얻어맞고 긴 그림자를 끌고 집에 왔다. 퇴근 시간이 아니었건만. 숨을 죽여 부엌에서 눈물을 훔치던 엄마의 모습은 나무 옹이처럼 그렇게 아직도 내 머리 속 깊숙한 곳에 단단히 박혀 있다. 철이 덜 들어도 괜찮을 나이였건만 깊은 바닷속에 쳐박혀 버린 듯한 집의 분위기는 가만 두지 않았다.
그때부터였을까?
아버지의 입가엔 '공부 열심히 해라.'는 말이 면도날에 덜 깎인 수염마냥 붙어있었다. 그렇게 두어해가 지나고 살 궁리를 하던 아버지는 살 도리를 하기 위해 타지로 훌쩍 떠났다. 코에 찡이 단단히 박힌 안전화를 어깨에 둘러매고서. 어지간한 것으로는 상처도 안 날 것 같은 안전화처럼 아버지는 그저 무뚝뚝하게 집을 나섰다. 그때는 몰랐지. 안전화에 발을 길들이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걸. 어쩌면 아버지는 사나운 삶의 바람에 몸을 내던지면서도 짐짓 태연한 척 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십수년이 지나고 군대 가기 전에,
아버지의 주선으로 잠깐이나마 아파트 건축 현장에 나가게 되었다. 안전 관리반. 그나마 공사 현장에선 수월한 쪽이었다. 맨홀 근처엔 노란 안전 딱지를 달아놓고, 덜 조여진 가건물 기둥은 보수하고. 고작 그뿐이었지만 그것도 노가다라고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고, 어깨엔 세상의 짊을 다 진 듯 했다. 그러면서 성질은 또 얌전치 않아서 공연히 아버지를 헐뜯는 박반장과 옥신각신이었다. "나는 그 시절에 J대를 나왔는데, 네 애비는 대학도 못 갔지 않느냐. 그러니까 나한테 잘 보여야 한다." 이런 요지였는데, 박반장은 몰랐다. 아버지가 집안 형편으로 인해 H대 공대를 합격하고도 포기를 했다는 것을. 그저 눈에 보이는 학벌만이 늘그막에 자랑거리였던 박반장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근면성실한 사람이었던 반면에 박반장은 근무 태만이 일상이었던 사람이었기에.
군 입대를 하는 나를 배웅하기 위해 ,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난생 처음 의정부로 향했다. 훈련소 앞에서 무슨 맛인지도 모를 밥을 억지로 입에 집어넣고 있을 때, 담배를 태우다 말고 주머니 속에서 구겨진 만원짜리 너댓장을 손에 쥐여주었다. 가지고 있다가 자대 가면 맛있는 것 먹으라고. 대충 먹는 시늉을 하다 허겁지겁 받아들고 그렇게 입대를 했었다. 그렇게 몇개월간 군생활을 하다가 훈련 중에 무릎을 다쳐 양주에 있는 군병원으로 가게 되었고, 눈물을 글썽이며 면회를 온 아버지와 마주하게 되었다. 고작 몇개월인데 그새 흰머리는 더 늘어나 있었고, 체구는 더 작아져 있었다.
또 그렇게 몇해가 지나고,
대학교 4학년 2학기를 앞둔 방학이었다. 몇 해만에 기록적인 한파라는 뉴스를 보고나서 계절 학기를 듣기 위해 학교로 향하던 중,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서 용인으로 향했다. 출근해서 아침 운동을 하던 중 다리 한 쪽이 말을 안 들어서 병원으로 후송됐다는 이야기였다. 용인으로 도착해서 병원으로 향했더니 눈 앞에 보이는 건 이미 몸의 절반이 마비가 되어 말도 못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정신없이 도착한 나를 향해 아버지는 왔냐는 말 없이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저 눈물만. 마비가 온 왼쪽 손, 발을 하염없이 주무르는 수 밖에 없었다. 집안 내력이니 학생도 조심해야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 셋이서 그렇게 겨울을 용인에서 났다.
그러던 어느날,
할머니가 병원에 찾아왔다. 종교 문제다 뭐다 해서 진작에 아버지는 연을 끊으려 했지만, 그나마도 큰 아들이라 간간히 연락을 한 터였다.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한다는 그 종교를 참 독실히도, 절실히도 믿는 할머니에게 목사 업을 하는 둘째가 더 믿음직스러웠을 것이리라. 헌금을 내려고 할아버지의 유품과 아버지가 운영한 표구사를 헐값에 팔아넘긴 할머니를 아버지는 참 싫어했다. 하지만 누워있는 터에 탓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래도 어머니니까. 누워있는 큰 아들에게 할머니는 들어오자마자 저주를 퍼부었다. 그 잘하던 기도는 하지도 않고. 참다 못한 어머니가 할머니와 목사 삼촌을 내쫓고 병실 안의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할머니와는 연락을 완전히 끊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언제쯤 끝날까 싶었던 일들이었다. 완벽히는 끝이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어서 참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몸이 조금 불편하실 뿐 많이 괜찮아지셨다. 길었다고 생각한 그 시간들이 햇수로는 꼬박 6년째다. 11월도 막바지고 12월 한달이 남았다. 또 그렇게 올해가 가고 새해가 올 것이다. 어떤 일들이 생길지는 모르겠다. 그저 그냥 그렇게 살아낼 뿐.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