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어간다는 건 세월이 몸에 배어드는 것. 늦은 봄, 이른 여름에 담가둔 장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장을 담그는 일은 겨우내 먹을 것이 떨어질 때를 대비하는 목적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음식의 참맛을 보기 위함도 있지요. 초록 물결이 서서히 노란빛으로 변하고 한창의 가을엔 황금빛 들녘을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장이 익어가는 것처럼 들판의 벼, 과수원의 과실들도 시간을 몸에 담아 고운 빛으로 풍경을 수놓습니다.
장독들을 고이 올려둔 낮은 축대 아래엔 여름비 잠시 멎은 틈을 타 개구리 두엇 나와 잠시 볕을 쬐고, 고동빛 장독 속에는 갖은 장들이 끔뻑끔뻑 숨을 쉬며 빛을 볼 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이 익기를 기다리는 건 기다림의 미학이라고도 한다더군요. 우리는 살면서 많은 기다림과 마주합니다. 약속을 잡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시험을 치고 결과를 기다리는 일,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면서 기다리는 일, 좋은 인연을 기다리는 일. 삶은 시험의 연속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는 삶을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기다린다는 건 내 시간을 온전히 쓰는 일이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마음 졸이기도 하는 일이지만 한편으론 기대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시간을 채우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늘은 점점 푸르고 지상과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장독 속 장들은 차분히 익어가고 있구요. 때론 잊었다가도 불현틋 생각이 납니다. 옛것들은 고리타분하다고들 하지만 그럼에도 오래 머물렀으면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장과 기다림. 우리는 또 어떤 것들을 기대하고 설레이며 주어진 시간을 채우고 있을까요? 가을의 문턱은 넘어섰고 이제 여름의 마지막 문을 향해 걸어가는 시간. 우리의 이 계절이 잘 익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