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외도를 안 지 80일] 피보다 따뜻한 관계

새벽, 공항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

by 권두팔

몇 시간 전, 한국에 도착했다.
몸은 비행기에서 눌린 베개처럼 구겨져 있었지만, 마음은 그보다 더 엉켜 있었다.
날 마중 나와 주기로 한 언니에게 도착 시간을 잘못 알려준 것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내 정신머리는 어디까지 바닥을 치는 건지.
착륙할 시간이 30분 정도 남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직 비행기 안은 너무 깜깜해서 지나가는 승무원에게 “언제 내리나요?”라고 물었다.
“아직 5시간 남았습니다”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
나는 진짜로 내 자신에게 실소가 나왔다.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시간을 잘못 말했다고 고백하고 싶었지만, 여기는 하늘 위..

한번 더 표를 확인할걸... 제대로 시간을 알려줄걸... 언니와 한 대화를 계속 확인했다.

우리는 대화가 많이 없었고 언니는 '조심히와'라는 마지막 말이 내 마음을 더 무겁게 눌렀다.
나는 그 뒤로 5시간, 비행기 안에서 괜히 토끼처럼 쪼그리고 앉아
죄책감을 껴안고 있었다.

부모도, 남편도, 친구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 묘한 고립의 시간 속에서
오직 언니 얼굴만 떠올랐다.
낯선 공항, 낯선 시간의 틈,
그저 “나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이라는 사실이
목울대를 뜨겁게 훑고 지나갔다.

착륙과 동시에 전화를 걸었고
언니는 이미, 내가 잘못 알려준 비행 편 시간에 비행기가 없음을 확인한 뒤였다. 나의 현재의 상황과 지능(?) 수준이 일반인이 아니라는 걸 고려해 한번더 확인 후 제시간에 맞춰
새벽 공기를 뚫고 나와 있었다.
그 사실 하나에 눈물이 불쑥 쏟아질 뻔했다.

공항 게이트에서 언니를 보자
고맙다는 말을 도대체 몇 번이나 중얼거렸는지 모르겠다.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종류의 고마움.
그냥 마음 깊은 곳에서,
이 사람은 내가 ‘믿어도 되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밀려왔다.

정말, 가족이라는 건 피가 섞여야만 완성되는 게 아니구나.
법적 가족보다 더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친혈육보다 더 내 편인 사람이 있다는 걸
이날 다시 깨달았다.

언니는 내 이야기를 억지로 캐묻지 않았다.
궁금했을 테지만, 묻지 않았다.
내가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사람.
그런 존재는 인생에 많지 않다.

나는 언니와 10여 년 전에 여행지에서 만났다.
관광지 구경하다 스친 인연이,
어느새 내 인생의 ‘기둥 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 인연이 없었다면
나는 참 외롭고 흔들리고 의심 많던 시절을
제대로 건너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언니가 출장 갈 때, 이직할 때, 이상하게도 언니가 보고 싶어서 연락하고 찾아가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한 게 다였는데... 그게 이렇게 쌓였다.

법적 가족은 아니지만,
언니는 내가 선택한 가족이다.
그리고 선택했기 때문에 더 단단해졌다.
인연도, 신뢰도, 애정도.

힘든 순간이 올 때마다
나는 내가 누구에게 기댈 수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그 답은 늘 선명했다.
오늘은 그 답이 더 또렷하게 빛났다.


넌 아니다.. 넌 아닌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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