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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사서 Feb 22. 2020

5. 결혼생활 업무분장

내 일 네 일 따지지 말고 일단 하자

"나는 오빠가 너무 가정적이지 않아서 결혼을 해도 될지 고민 돼. 그게 많은 싸움의 원인이라고 하는데"

"맞아. 나는 가정적이지 않고, 정말 집안일 같은 거 해본 적 없어. 그런데 그게 결혼이 걱정될 문제야? 그게 뭐가 중요해. 서로 노력하고 맞춰가면 되잖아."


결혼 전 둘 다 팩폭 하는 스타일이라서 한 번씩 주고받고 합의점을 찾아나갔다.

 



남편이 요구했던 것은 다른 것은 배워서 도우면서 할 수 있지만 빨래와 요리만은 자기가 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거였다. 자취를 하기도 했어서 대략적인 청소나 설거지 같은 거는 살기 위해서 조금씩 하긴 했지만, 빨래는 자기가 하면 냄새도 나고 소질이 없다는 것이고, 요리는 할 수는 있지만 생존 요리에 가깝기 때문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 해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내가 요구했던 것은 설거지는 주로 남편이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이미 상해있는 손이라 설거지를 하면 건조함에 부르트기 일수라 손도 너무 상하고, 정리에 큰 소질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요리는 내가 즐거운 일이고 재미있는 일이니 내가 되도록 하겠지만 맛있게 먹고 설거지는 남편이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요구를 했다.  


모든 요구는 상호합의하에 평화적으로 수용되었다.


나머지 청소, 정리, 음식물쓰레기 버리기, 분리수거는 공동의 영역으로 하기는 하지만 청소와 정리는 내 지분이 좀 더 크고, 음식물쓰레기 버리기와 분리수거는 남편의 지분이 더 크다. 이 부분은 서로 돕는다. 같이 하기도 하고, 서로 바쁠 때는 대신하기도 하고 경계가 명확하지 않아서 더 서로 협업이 잘 되는 것 같다.


결혼생활이 길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100일이 넘도록 부부싸움 한번 없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결혼하고 처음 1년은 죽도록 싸운다는데 그 시기가 그냥 조용조용 지나가고 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굳이 그 이유를 따져보자면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서로에게 집안일을 강요하지 않는다. 특히 남편이 집안일을 나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내가 휴일이 주말이 아닌 직업이다 보니까 서로 쉬는 날이 다를 때가 더 많은데 그럴 때면 출근하면서 "오늘 약속 있어? 그것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쉬어."하고 나간다. 이게 정말 기분 탓인데 그렇게 말하든 이것저것 해놔 하고 나가든 어차피 같은 일을 할 텐데 그냥 기분 좋게 하루를 보낼 수 있다. 나도 남편이 쉬고 내가 출근하는 날이면 굳이 이것저것 시키지 않고 "잘 놀고 있어. 밥 잘 챙겨 먹고. 밥 잘 챙겨 먹기가 오늘 오빠 일이야."하고 나온다. 그래도 퇴근하면 남편이 설거지도 깨끗이 해놓고, 어지르지 않고 얌전히 놀고 있다. 가끔 "나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건드렸어."하고 뿌듯하게 말하면 얄미울 때도 있는데 그래도 안 어지르는 게 어디인가 싶다.


둘째는 서로 적성에 맞는 일을 한다. (이것은 순전히 내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요리하는 게 정말 즐겁다. 그리고 남편이 맛있게 먹어주기도 하고 나도 바깥 음식보다는 집밥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하루의 한끼는 무조건 외식을 하게 되니까 그러다 보면 좀 중심을 잡으려고 일부러 집밥을 먹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요리를 해두고 먹는 게 재미있다. 내가 남편보다 출근이 더 빠르고 퇴근이 더 빨라서 아침은 차려두고 출근해야 할 때가 많지만, 저녁은 내가 먼저 퇴근해서 준비하면 딱 시간이 맞다. 그러다 보니, 아침은 대충대충, 저녁은 매일이 파티일 정도로 차려먹는다. 그러고 나면 뒷정리는 남편이 깨끗하게 참하게 설거지를 해놓는다. 가끔 그런 설거지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볼 때면 짠하기도 하고 또 행복하기도 하고 '정말 결혼 잘했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설거지하는 남편 뒤에서 손뼉 치면서 "내 남편이 최고다. 설거지해주는 남편이랑 결혼하다니 내 인생이 성공했다." 오버해서 칭찬해준다. 남편의 어깨가 으쓱으쓱 궁둥이가 씰룩씰룩한다.


셋째는 집안일은 같이 한다는 원칙으로 어느 한쪽에 부담을 주지 않는다.

결혼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 남편이 자기가 힘들일(몸을 쓰는 일) 하고 왔고, 그러니까 쉬고 싶다는 반항 아닌 반항을 하기도 했다. 살짝 마음이 약해질 뻔했지만 처음에 같이 달리는 사람이 힘드니까 쉬고 싶다고 뒤쳐지는걸 그냥 두면 나중에 나 혼자 멀리 가서 기다리다가는 지쳐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일 전체의 양을 줄였다. 매일매일 하던 청소를 일주일에 한두 번 몰아서 하는 걸로 줄이고, 빨래도 일주일에 두세 번, 분리수거는 일주일에 한 번 이런 식으로 양을 줄이고 분담하는 것은 비슷한 수준으로 나누었다. 그러다 보면 매일 돌리던 청소기를 돌리지 않으니 가끔 먼지가 굴러다니기도 하고, 정리가 안 되기도 하지만 그건 서로 묵인하게 되었다. 어쨌거나 맞벌이를 하고 있고 가정일도 완벽하게 하고, 회사일도 완벽하게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어느 정도 내려놓고 같이 하기로 했다. 그러다 못 참는 쪽이 더 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살고 있다.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집들이를 하는 날 설거지를 하는 남편을 본 시누이가 말하기를 "진짜 평생 한 설거지보다 오늘 많이 하네. 아주 몰아서 하네."하기도 했다. 남편이 자랑스럽게 "나 우리 집 설거지 담당이야." 하니까 시누이가 피식하고 웃었다.


가끔 시어머니께서 내가 일 나가고 남편은 쉬는 날 전화해서 "며느리가 힘들지 않게, 쉬는 날이면 청소도 하고 정리도 하고 해라." 하면 남편이 당당하게 "나 지금 설거지하는 중이니까 일단 끊어요."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럼 어머니도 허허허 하고 웃으셨다고 했다. 나한테 어머니가 조용히 오셔서 물으셨다. "쟤 아주 설거지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더라? 진짜 잘하고 있어?" "네! 아주 깨끗이 잘해요." 옆에서 듣고 있던 남편이 "나 설거지 잘해!!"하고 당당히 말했다.  


어차피 같이 해나가야 하는 일이고, 서로의 배려 없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다.


앞으로 우리에게 아이가 생기고 육아가 시작되면 아무래도 지금처럼 평화로운 집안일 업무분장도 어려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육아에 치이고, 아이가 있으니 청소도 더 신경 써야 되고, 집안일이 두배로 많아지는 게 아니라 몇 곱절로 늘어나리라는 것도 예상하고 있다. 그때까지 평화로울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 조금 아득해지긴 하는데, 지금은 베타 버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로 무엇을 못 참는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또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 약한 부분은 무엇이고, 강한 부분은 무엇인지 맞춰나가고 조율해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혼사유의 가장 높은 이유가 성격차이라는데,
정말 만에 하나 천만에 하나 우리가 이혼을 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이유가 성격차이는 아닐 것 같다.
정말 나에게 없는 걸 남편이 가지고 있고, 남편이 없는 걸 내가 가지고 있고,
그런 서로에게 필요한 것 더 잘하는 것을 합치면 온전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만났을까. 다시 생각해도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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