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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동규 Jul 05. 2022

파수꾼


     

평범한 일상은 중요한 사건에 밀려 시간을 따라 잊혀 지기 십상이다. 한편 시간의 흐름과는 별개로 결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래서 잘 기억나지 않는 경험도 있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자신의 소설 『도라 브루더』에서 도라 브루더의 흔적을 찾는 ‘나’로 등장해 제2차 세계대전이 남긴 상처를 많이 잊어버린 당대 프랑스 사회를 보여주었다. 이런 모습은 1988년 ‘나’에게 찾아온 역할 변화와 이후 1996년까지 프랑스 곳곳을 다시 찾아다니던 그의 몇 가지 감상 속에서 잘 드러난다.

 ‘나’는 오르나노 대로가 있는 북쪽 구역을 오랜 기간 알고 지냈다. 1965년부터 1968년까지 3년 동안 이 구역을 여러 차례 지나다니기도 했다.1) 그런데 1965년의 어느 하루에 대한 ‘나’의 회상은 이렇다. “1965년 1월, 오르나노 대로와 샹피오네 길이 만나는 교차로에 저녁 여섯 시경 밤이 내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난 그저 그 황혼녘에, 그 거리들에 섞여 있을 뿐이었다.”2) 작가가 이 당시의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표현한 것은 정말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했다기보다 기억에 남을 만큼 특별한 역할을 맡고 있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도라 브루더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1965년의 ‘나’는 1988년 도라 브루더 실종 기사를 접하고 나서 자신이 맡은 특별한 역할을 감지하게 되었다. 특별한 역할은 이렇다. “마치 내가 먼 어제의 파리와 오늘의 파리를 이어주는 유일한 연결끈이라도 되는 양, 그 모든 삶의 편린들을 홀로 기억하는 듯한 느낌에 빠져든다.”3) 작가가 도라의 흔적을 수소문하고 그녀 삶을 재구성하기 시작한 것은 이 끈이 끊겨버리지 않도록 할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의무감 속에서 ‘나’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 아버지의 이야기, 희생된 유대인들의 편지를 제시하면서 도라와 가까워졌지만 정작 도라의 직접적인 정보를 찾고 확인하는 과정은 녹록지 않았던 모양이다. 우선 1996년 2월 도라의 출생증명서 등본을 신청하여 받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4) ‘나’와 도라 사이에 아무 연고가 없어 구청에서 출생증명서 등본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모디아노가 생각한 창구 사내는 ‘망각의 파수꾼’5)이었다. “부끄러운 비밀을 감호하면서 누군가의 삶에 대한 최소한의 흔적이라도 일단 추적해오는 자들에게는 금지하도록 책임을 맡은 파수꾼 사내.”6) 시간이 지체될수록 남아있는 흔적에 다가가기 힘든 전쟁 희생자들에 대한 예외 처리가 되어 있지 않아 직접 법원에 예외 신청해야 한다는 점이 발급이 오래 걸린다는 사실보다 부당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1996년 4월 ‘나’는 도라가 보호받았지만 도주를 감행한 마리아 성심 기숙사 부근과 이후 도라가 붙잡혀 수감되었던 투렐 구역을 찾아갔다.7) 마리아 성심 기숙사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고 투렐의 엣 병영은 철거되지 않았지만 ‘군사 지역 영화 촬영 금지’8) 팻말이 달려 있을 뿐이었다. 두 곳 모두 모디아노의 표현대로 “이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공허와 망각의 지대”9)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해 가을, 전쟁 후에 많은 건물이 철거되고 새로 들어선 자르댕 생폴 가에서 ‘나’의 공허감은 더 깊어졌다.10) 모디아노는 “사람들은 투렐의 담벽에서처럼 ‘군사 지역 촬영 금지’ 팻말을 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모든 걸 흔적도 없이 소멸시키고 그 자리에 일종의 스위스 촌락을 건설했다.”11)고 쓰며 자신이 느낀 상실감을 감추지 못했다.

 프랑스 사회가 전쟁의 아픔과 나치에 협력했던 부끄러운 사실을 “행정적 결정에 따라 조직적으로”12) 망각해버리면서 ‘나’는 도라의 출생증명서를 발급받을 때와 도라와 관련된 장소를 찾아다닐 때마다 번번이 좌절과 공허를 맛보고 말았다. 멈추고 싶은 충동도 있었겠지만 다행히 파트릭 모디아노는 의무감과 ‘끈기가 있는’13) 사람이었다. 파수꾼이라는 호칭은,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도라 브루더에 관한 가장 중요한 기록을 남긴 그 자신에게 더 어울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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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트릭 모디아노, 김운비 역, 『도라 브루더』, 문학동네, 1997, 8-10.

2) 파트릭 모디아노, 위의 책, 9.

3) 파트릭 모디아노, 위의 책, 59.

4) 파트릭 모디아노, 위의 책, 17-21.

5) 파트릭 모디아노, 위의 책, 18.

6) 파트릭 모디아노, 위의 책, 18.

7) 파트릭 모디아노, 위의 책, 146.

8) 파트릭 모디아노, 위의 책, 149.

9) 파트릭 모디아노, 위의 책, 149.

10) 파트릭 모디아노, 위의 책, 154.

11) 파트릭 모디아노, 위의 책, 154-155.

12) 파트릭 모디아노, 위의 책, 154.

13) 파트릭 모디아노, 위의 책,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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