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나의 어릴 적 친가의 공기

아쉬움은 가득해도, 그래도 그리운 그곳

가끔 네 엄마와 투닥거리는 것 중 하나인, 엄마는 지방 사람이고 아빠는 서울 사람이라는 거, 진짜야. 아빠는 서울에서 태어났어. 하지만 탄생 신고는 경기도에서 했기 때문에 주민번호가 12로 시작하지. 음. 아빠의 뿌리는 조금 더 멀리 있어. 할아버지는 강원도 강릉 사람이었고, 할머니는 춘천 사람이었단다.


두 분의 만남은 요즘 영화처럼 낭만적이지는 않았다고 들었어. 할머니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자매끼리 살며 버스 안내양 일을 하셨고, 할아버지는 형은 있었지만 그 형은 공부를 했고 어린 동생을 키우기 위해 버스 기사로 일하셨다고 들었다. 각자 부모 없이 어린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그 무거운 공통점이 두 분을 부부로 맺어주었다고 하더라고.


지금도 어린 시절 아빠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때는 사랑보다는 생존이 먼저였던 시절이었다고 해. 그 후 할아버지가 버스 기사를 그만두고 어떤 회사에 취업하시면서 우리 가족은 경기도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면서 아빠는 서울에 있는 ‘A 병원’에서 태어났어. 당시 아빠가 살던 동네에는 마땅한 산부인과가 없어서 그곳까지 가셨다고 했어. 큰 고모는 춘천, 작은 고모는 금산에서 각각 태어났다. 그만큼 네 할머니 할아버지는 삶의 부침이 심했고 고단하게 살아오셨어.


할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고 홀로 세상을 버티신 분이란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 법도, 주는 법도 잘 모르셨던 것 같아. 할머니에게는 지나치게 집착하셨고, 자식들에게는 따뜻한 관심보다는 엄격한 통제로 당신의 자리를 지키려 하셨지. 또 부끄러운 부분이지만 네 할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들도 버젓이 했었단다. 아빠는 어릴 때부터 그 사실이 너무 싫고 부끄러웠어. 같은 남자로서 네 할머니에게 미안할 지경이었지.


그 시절엔 ‘남아선호사상’이라는 게 아주 강했단다. 그래서 아빠와 고모들 사이에는 은근한 차별이 있었고, 자식은 무조건 부모의 뜻에 따르는 것이 도리라고 믿으셨지. 할아버지는 고모들이 교사가 되길 원하셨고, 아빠는 군인이 되길 바라셨어. 6.25 전후 시대와 박정희 대통령부터 전두환 군사 독재를 거치며 자라오신 분이라 ‘육군사관학교’가 인생의 가장 좋은 길이라고 믿으셨던 게지. 하지만 뭐든 과하면 반작용이 생기는 법이란다. 결국 할아버지가 바랐던 자식들의 모습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어.


집안 분위기는 늘 팽팽했단다. 통금은 물론이고, 밥상머리 예절이나 손님을 맞이할 때의 태도에 대해 아주 예민하셨거든. 아빠는 어릴 때 할아버지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야 했고, 수많은 친척과의 교류도 아빠의 의사와 상관없이 필수였단다. 어릴 땐 그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마흔이 되어 돌아보니 그 모든 형식이 꼭 목을 맬 정도로 중요했던 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간을 좀 더 자유롭게 보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지. 하지만 아들아,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빠가 할아버지에게 느꼈던 서운함이나 부정적인 모습들을 너에게는 물려주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야.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할아버지의 그 엄격함 덕분에, 아빠가 어디 가서 ‘못 배웠다’는 소리를 한 번도 듣지 않고 반듯하게 자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단다.


너 역시 타인에게 예의를 갖추되, 아빠보다는 조금 더 자유롭고 다정한 사람으로 자라주었으면 좋겠구나.


재미있던 에피소드가 하나 있어. 2002년 월드컵의 열기가 뜨거웠던 그 해 겨울, 수능이 끝나 저녁에 집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너희 할아버지가 급하게 집에 들어오시더니 짐을 싸고 도망갈 준비를 하라고 한 적이 있었었어. 무슨 일인가 했더니 너희 할아버지가 로또 1등에 당첨되었다는 거야. 다들 진짜? 하면서 물어봤는데 네 할아버지가 주신 신문(당시엔 스마트폰이 없었단다)에 번호와 일치한 거야.


다들 진짜인 줄 알고 허둥지둥 짐을 싸면서 진짜 설레어했지. 모든 가족들이 놀라서 허둥대고 있을 때 할머니인가 고모인가가 헛웃음과 함께 한 마디를 날리며 상황은 종료되었단다.


이거 전 주 번호야


그때의 허탈함은... 그리고 가족들은 다들 웃으며 다시 짐 정리를 했단다. 그때가 문득 생각나네. 항상 뭔가 긴장과 적막이 있었던 우리 가족들이 다 웃었던 몇 안 되는 기억이야.

이전 01화프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