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창밖으로 배운 사계절의 철학
아들아, 아빠의 초등학교 시절을 단 하나의 단어로 요약해야 한다면, 아빠는 주저 없이 ‘망우리 고개’라고 말할 것 같아. 오늘 이 글을 쓰려고 지도 앱을 통해 보는데 완전히 바뀌진 않아도 중턱까지 아파트가 지어진 것 같구나. 대단해 진짜. 하지만 30여 년 전 그곳은 아홉 살 소년이었던 아빠에게는 매일 아침 마주해야 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험준한 산맥이었지. 그 고개는 단순히 지리적인 경계가 아니라, 구리라는 터전과 서울이라는 세계를 잇는 통로이자, 아빠의 유년기를 지배했던 고독과 인내의 상징이었단다.
아빠는 국민학교 1학년 2학기라는, 아직 엄마 품이 더 익숙할 나이에 경기도 구리에서 서울 중랑구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갔어. 유치원과 1학년 1학기까지는 집 근처 구리에서 다녔었지. 그런데 네 할머니는 아빠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환경, 소위 말하는 ‘서울 학군’에서 공부하기를 간절히 바라셨단다. 지금 생각하면 불법 전입까지 감수하며 내린 할머니의 무리한 결정이었지. 훗날 네 할머니와 그때 이야기를 나누며 “왜 그렇게까지 하셨어요?”라고 물으면, 할머니도 그저 허허 웃으시며 “나도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저 자식 잘되길 바라는 욕심이었지”라고 하시더구나. 아빠는 할머니를 원망하지 않는단다. 그건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어머니의 서툰 사랑 방식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사랑의 대가로 아홉 살 아빠의 일상은 조금 일찍 고단해졌어.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는 아이 걸음으로 족히 30분을 걸어가야 했단다. 초등학교 5~6학년이 되어서야 아파트 뒤편에 정류장이 생겨 조금 편해졌지만, 그전까지는 매일 아침 ‘교문사거리’라는 곳까지 먼 길을 걸어가야 했어. 겨울이면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 콧물을 훌쩍이며 가방을 고쳐 매고 걷던 그 서늘한 공기가 아직도 살갗에 느껴지는 것 같구나.
그때는 지금처럼 카드를 찍는 게 아니라 ‘회수권’이라는 종이 차표를 묶음으로 사서 한 장씩 잘라 썼단다. 아빠보다 윗세대인 네 고모들은 ‘토큰’이라는 동전을 썼지만, 아빠 시대엔 얇은 종이 조각이 아빠의 유일한 통행증이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범죄지만 그때 어린 나이에는 용돈을 조금이라도 모아 과자를 먹고 싶어서 회수권을 2/3 정도씩 찢어서 3장을 4장으로 만든다거나 100원을 넣어야 하는데 50원짜리 하나 10원짜리 4개를 넣으며 10원씩 아낀다거나 해서 모았단다. 그러다 걸려서 혼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해해 주시는 분들이 많았고, 어떤 기사님은 초코파이를 사주셨던 분도 계셨단다. 그렇게 버스 정류장 근처 가판대에서 회수권을 사서 주머니에 넣으면, 왠지 모를 든든함과 긴장이 동시에 몰려왔어.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버스 정류장 근처엔 꼭 가판대가 있었다. 위에 말한 회수권이나 토큰을 팔기로 하고 담배나 껌을 파는 가판대가 있었지. 지금도 가끔 로또나 복권을 파는 곳으로 남아있기도 한 것 같고. 여하튼 그곳 주변엔 항상 조금 불량해 보이는 형들이 있었다. 왜냐면 가판대에서는 소위 ‘까치 담배’라고 부르는, 담배를 낱개로 파는 행위가 있었는데 뭐 그때야 아무나 담배를 살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형들이 우리 용돈 1~200원 빼앗아서 까치 담배를 사 피우는 사람이 많았어. 그래서 그 근처 골목길은 항상 무서운 곳이었단다. 그리고 그런, 이른바 ‘깡패’라고 불리는 형들에게 걸려 용돈을 빼앗기기도 했단다. 무서운 형들이 골목으로 불러 세워 주머니를 뒤질 때, 아빠는 속으로 ‘제발 회수권만은 가져가지 마라’고 빌었어. 돈은 빼앗겨도 괜찮지만, 회수권이 없으면 학교에 갈 수도, 집으로 돌아올 수도 없었으니까. 다행히 그 형들은 종이 쪼가리인 회수권엔 관심이 없었고, 아빠의 짤랑거리는 몇 백 원만 가져가곤 했지.
하지만 등굣길이 괴롭기만 한 건 아니었어. 교문사거리까지 오고 가는 길은 아빠에게는 모험과도 같았거든.
등굣길은 하굣길에 비해 비교적 빨리 가야 하는 길이어서 좀 빠른 템포로 걷긴 했어도 아직 많은 게 기억난단다. 당시 구리에는 이주일이라고 하는 유명한 개그맨 분께서 정치인을 하셨었는데, 올라가는 길에 이주일 사무소라고 크게 적혀 있어서 항상 저 건물엔 누가 일할까 궁금해하곤 했었어. 그리고 삼육초, 중학교를 지나면 그 근방에 아주 큰 배밭이 있었단다. 거기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바로 그 나무를 지나치는 게 도착의 의미였지. 지금은 다 상가 건물로 바뀌었어.
하굣길은 천천히 길가를 둘러보며 모르는 길도 가보고 여기저기 구경하는 시간이었어. 오는 길의 한 루트에는 교문초등학교가 있었는데 거기 앞 문방구에는 항상 미니카 트랙이 설치되어 있었단다. 하교 시간이면 그 트랙 주변으로 아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지. “위이잉” 소리를 내며 트랙을 질주하는 미니카들을 넋을 놓고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어. 서로 누가 좋은 모터를 가지고 있는지 서로 목소리를 내며 나도 은근히 한 번씩 올려보곤 했단다.
그리고 당연히 분식도 빼놓을 수 없었지. 다른 것보다 그 옆 가판대에서 팔던 ‘닭꼬치’의 냄새는 또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모른다. 원래 "똥집"이라고 불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염통인지 똥집인지 모르겠어. 여하튼 짭조름하고 달콤한 소스가 발린 그 맛은 성인이 되어서도 잊지 못해, 대학교 시절 일부러 그 동네를 찾아가 사 먹었을 정도였어.
드디어 버스에 올라타 망우리 고개로 향하면, 아빠의 눈앞엔 계절마다의 변화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단다. 구리를 벗어나 서울로 진입하기 직전, 가장 먼저 마주하는 건 거대한 ‘탱크 저지선’이었어. 만약에 전쟁이 나면 터뜨려서 길을 막기 위해 만든 콘크리트 구조물이었는데, 처음엔 뭔지 몰랐다가 우연히 알게 되면서 어린 아빠는 그 거대한 구조물을 지날 때마다 묘한 긴장감을 느꼈어. 하지만 그 저지선을 지나 ‘딸기원’이라는 동네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하면, 창밖으론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단다.
여름에는 숨이 막힐 듯 짙은 녹음이 창 안으로 밀려들어 왔고, 가을에는 나무 사이사이로 붉게 물든 단풍이 마음을 일렁이게 했어. 특히 아빠가 가장 좋아했던 건 봄의 망우리 고개였단다. 고개 전체가 노란 개나리로 뒤덮여 흐드러지게 피어날 때면, 그 눈부신 노란색이 마치 아빠를 압도하는 것 같았어. 운 좋게 버스 창가 자리에 앉아 흐드러진 개나리를 보며 학교로 향하는 날은, 먼 등굣길의 고단함도 잠시 잊을 수 있었지.
그리고 서울시로 진입하면 그때 망우리 고개를 지나 동부제일병원을 넘어 금란 교회로 갈 수 있었지. 금란교회는 아빠가 처음 학교 다닐 땐 그렇게 크지 않았는데 초등학교 말 때인가 공사를 크게 하더니 당시에 국내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라고 하는 엄청난 크기로 지었단다. 그리고 거기서 육교를 지나 길을 넘어 학교까지 열심히 걸어갔어. 아직도 눈 감으면 그 길, 가는 길에 있었던 수많은 문구점들이 생각난다. 거기에 아이들이 많으면 아직 늦지 않은 거였고 아이들이 없으면 늦은 거여서 부리나케 달리기도 하곤 했어. 망우리 고개에서 사고 한 번 나면 차가 꽉 막혀서 그대로 도로 위에 멈춰있었거든.
겨울의 망우리 고개는 혹독했어. 그때는 지금처럼 제설 작업이 빠르지 않았고 염화칼슘도 귀했단다. 눈이 발목까지 쌓이는 날이면 버스는 고개 중턱에서 숨을 헐떡이다 멈춰버리기도 했고 아예 진입부에 멈춘 차도 있었어. 아빠는 집에 빨리 가고픈 마음에 그 눈 덮인 망우리 고개를 걸어 넘곤 했지. 가방을 메고 눈발을 헤치며 고개를 넘어 집까지 한 시간 반을 걸어오던 길. 손 끝은 시리고 발가락은 감각이 없었지만, 저 멀리 탱크 저지선이 보이면 ‘이제 다 왔구나’ 하는 안도감에 다시 힘을 내어 뛰곤 했단다.
거기서부터도 30분을 더 가야 했는데도 말이야. 아마 아빠가 지금도 걷는 것을 유독 좋아하고 잘하는 건, 그때 그 고개를 넘으며 다져진 끈기 덕분인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또 집으로 가는 길 버스를 타고 망우리 고개를 지나면 거기에 아주 조그만 한 컨테이너가 있고 라디오 송출국이 있었단다. 아빠는 어릴 때 거기가 진짜 방송국인 줄 알았어. 그래서 그 컨테이너 아래에 무슨 건물이 있는 줄 알고 그 근처에 라디오 진행하는 사람들이 정말 있는 줄 알았지. 근데 알고 보니까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같아.
학교에 도착하면 본격적인 ‘정글’이 시작되었단다. 한 반에 40명이 넘는 아이들이 복작거렸고, 학생 수가 너무 많아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하기도 했어. 운동장에는 늘 축구하는 아이들과 고무줄놀이하는 아이들이 뒤섞여 모래 먼지가 자욱했지. 겨울 교실 풍경은 지금의 너로서는 상상도 못 할 모습이었을 거야. 교실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난로가 있었는데, 학생들은 매일 아침 ‘당번’이 되어 난로에 넣을 조개탄이나 석탄 뭉치를 창고에서 받아와야 했어. 난로 옆자리는 따뜻해서 졸음이 쏟아졌지만, 창가 구석 자리에 앉은 날은 입김을 불며 손발을 비비며 수업을 들어야 했지.
하지만 점심시간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순간이었단다. 급식이 없던 시절이라 모두가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먹었지. 요즘 아이들은 아파트 평수나 부모님의 차종으로 서로를 평가한다지만, 그때의 우리에겐 ‘도시락 반찬’이 가장 확실한 신분제였어. 아무리 잘 사는 집 아이라도 도시락 속에 김치와 나물만 있으면 ‘못 사는 집’ 취급을 받았고, 반지하에 사는 아이라도 도시락에 ‘미니 돈가스’나 ‘분홍 소시지’가 들어 있으면 그날의 영웅이 되었단다.
아빠는 옛날에 네 유치원 수저 세트 챙기는 것을 깜빡해서 아침에 급하게 설거지해 주곤 했었지. 그러면서 문득 네 할머니 생각을 했었단다. 그 시절 할머니는 어떻게 그 추운 겨울 아침마다 자식 셋의 도시락을 그토록 정성스럽게 싸주셨을까. 지금이야 시리얼이나 빵으로 아침을 때우기도 하지만, 할머니는 단 한 번도 아침밥을 거르게 한 적이 없었어. 따뜻한 밥을 보온 도시락에 꾹꾹 눌러 담고, 냄새가 샐까 봐 헝겊으로 꽁꽁 싸매주던 그 정성. 네 할머니가 자식들을 위해 보냈던 그 치열한 아침들이 지금의 아빠를 만든 밑거름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단다.
등, 하굣길은 위에 말했다시피 그래도 낙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아빠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등하교의 고단함보다 하교 후의 지독한 외로움이었어. 멀리 떨어진 서울의 학교를 다니다 보니, 정작 아빠가 사는 구리 동네에는 같이 놀 친구가 없었단다. 학교 친구들은 모두 서울 학교 근처에 모여 놀았고, 아빠는 학교가 끝나면 다시 홀로 버스를 타고 고개를 넘어 적막한 동네로 돌아와야 했지. 물론 집 근처에 아는 친구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 친구들도 결국 하교 후엔 학교 친구들과 놀았고 아빠는 어색하게 무리에 끼거나 주말 같은 때나 놀 수 있었어.
집에 오면 네 고모들은 학원이나 방과 후 활동으로 늦게 귀가했고, 아빠는 텅 빈 거실에서 혼자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어. 그때 아빠의 유일한 친구는 낡은 테니스 공 하나였단다. 아파트 단지 외곽의 콘크리트 벽에 대고 홀로 공을 던지고 받는 놀이. “탁, 탁” 벽에 부딪히는 공 소리만이 아빠의 유일한 말동무였어. 친구들과 땀 흘리며 뛰어놀지는 못했지만, 벽을 향해 끊임없이 공을 던지며 아빠는 스스로의 호흡을 다스리고 고독을 견디는 법을 배웠던 것 같아.
학교에서 보이스카우트라는 걸 신청받을 때 운동장에서 밤을 새우며 같이 캠핑하는 것이 있다고 해서 그걸 신청했던 게 생각난다. 그게 생각보다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어서 네 할머니, 할아버지는 좀 부담이었던 것 같아. 어린 나이에 눈치를 챘었음에도 생떼를 써가며 가입하고 단복을 맞추고 했었는데 사실 저 캠핑이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거였거든 나도 망우리 학교 친구들과 저녁까지 놀고 싶어서, 그런데 그때 무슨 사건으로 학교 캠핑이 무산되어 정말 엄청나게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아들아, 아빠는 가끔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참 안타깝단다. 남들보다 너무 일찍 세상의 거칠함을 알게 된 소년, 친구들과 재잘거리는 시간보다 버스 창밖의 풍경을 보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야 했던 그 아이가 가여워서 말이야. 그래서 아빠가 너의 초등학교 진학을 고민할 때,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굳이 먼 사립학교가 아닌 집 앞 공립학교를 고집한 것이란다. 아빠는 네가 학교 끝나고 가방을 메고 집까지 걸어오는 길에 친구들과 아이스크림 하나 나눠 먹을 수 있는 여유가 있길 바랐어. 아빠처럼 열쇠를 놓고 와서 담을 타 넘어갈 생각을 하거나 추운 현관 앞을 서성이며 누군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그 쓸쓸한 기다림을 너에게는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
요즘 너희 세대를 보면 스마트폰 화면 속에 갇혀 서로의 얼굴을 보기보다 액정 위를 구르는 손가락에 더 집중하는 것 같아 아쉬울 때가 많단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빠처럼 먼 길을 홀로 걷는 고독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해. 비록 너희가 만나서 각자 게임만 한다지만, 그래도 누군가와 ‘함께’ 공간을 공유하며 즐거워하는 그 마음만큼은 아빠도 충분히 이해한단다. 아빠도 중학교 시절 친구네 집에 옹기종기 모여 플레이스테이션으로 ‘철권’을 하던 그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기억 중 하나로 남아 있거든.
아들아, 부디 많이 어울리고 많은 기억을 남기렴. 때로는 고독이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유년기의 다정한 기억들은 네가 어른이 되어 거친 세상을 만났을 때 너를 지켜주는 가장 따뜻한 방패가 되어줄 거야. 아홉 살 아빠가 망우리 고개의 개나리를 보며 위안을 삼았듯이, 너의 마음속에도 너를 지탱해 줄 수많은 빛깔의 기억이 가득하길 바란다. 이 평범한 기록들이 너에게 조금 더 다정하고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주는 작은 밑거름이 되기를, 아빠는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