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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by 권권우

사실, 할아버지와 큰 유대감은 없다. 할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별로 없고 기억에 남는 추억도 딱히 없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할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할머니와 엄마를 힘들게 하시는, 그저 무뚝뚝하고 당신밖에 모르시는 그런 분이라고만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나는 할아버지를 잘 알려고 했던 적도 없다. 그래서 그런지 그냥 항상 그 자리에 계속 그 모습으로 계실 거라고만 생각했다. 어리석게도.


친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이 글에서 언급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외가댁 분들이시다) 이미 같은 것을 느꼈으면서 그새 잊은 것이다. 항상 같은 모습이실 거라고 생각했던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누가 저분이 그 할머니시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있으셨다. 내 기억 속 할머니는 언제나 화려하고 도도하고 꼿꼿하신 그런 분이었는데 그 모습이 아예 없었다. 그때 처음 제대로 깨달았다. 나이가 들고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것이 어떤 건지를 비로소 목격했다.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외할아버지는 친할머니와 달랐다. 친할머니는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병마와 싸우다 세상을 떠나셨지만 외할아버지는 가벼운 고혈압, 당뇨조차 없이 건강하셨다. 물론 나이가 90이 가까워 오시는 만큼 점점 인지 능력이 떨어지시고, 기력이 쇠하시긴 했지만 가야만 하는 병원, 챙겨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약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처음엔 내가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새벽 6시 반 정도였을까, 한창 자고 있을 시간대에 아빠가 나를 깨웠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서. 비몽사몽한 몸 상태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소식을 더한 결과는 의심이었다. 내가 또 꿈을 꾸다 새벽에 깼나? 아니면 아직도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러나 대충 정신을 차리고 할머니 집을 가보니 그것은 당면한 현실이었다. 착잡한 표정의 외삼촌, 오열하고 계시는 할머니, 그런 할머니를 진정시키는 외숙모, 울고 있는 엄마와 옆을 지키는 아빠. 그리고 침대에 누워 주무시고 계시는 것만 같은 할아버지. 예전엔 잡아본 적이 없던 할아버지의 손을 잡아보니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왜?라는 물음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마음껏 슬픔에 빠져 있을 겨를도 없이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의 가시는 길을 배웅할 준비에 바빠야 했다.


119와 경찰을 부르고, 의사를 불러 사망 신고를 받고,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서 할아버지를 모시러 왔다. 돌아가신 지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다는 구급대원 분의 말처럼 할아버지의 몸은 이미 많이 굳어 있었다. 지은 지 오래되어 엘리베이터도 없고 계단조차 많이 좁은 할아버지 집의 복도를 힘겹게, 들것에 단단히 고정된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지나가셨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직접 걸어 오르셨던 그 계단을, 아들과 손자 그리고 장례지도사의 손에 들려 마지막으로 지나가셨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장례 상담을 받고, 장례식장을 정하고 음식을 준비하고 손님들을 받고. 대부분의 것은 어른들의 몫이었고 나는 입구에 앉아서 부의금을 받고 손님들 안내를 맡았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던 스물한 살 그때보다는 조금 나았지만 여전히 모든 것이 서툴러 한 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 긴장은 감정을 잊게 했지만 조문객을 맞을 때마다 다시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을 터뜨리는 엄마와 할머니를 계속 보고 있는 것은 감정적으로 많이 힘겨웠다. 나중엔 일부로 입구에서 손님을 맞는 일에만 집중했다. 나까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일부로 엄마와 할머니를 보지 않았다.


사람 몸보다도 솔직한 것은 없다고 했나.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배는 고팠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먹어도 먹어도 돌아서면 또 배가 고팠다. 아마 그 장례식장에서 나보다 잘 먹은 사람은 없을 거다. 장례를 치른다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체력을 요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또 하필 학교 시험 하나와 겹쳐 중간에 학교를 가서 시험을 보고, 저녁 수업은 교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결석한 뒤 바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그날 나는 시험 준비를 생각만큼 많이 하지 못하고 시험을 봐야 했던 것과, 시험 직전 주의 수업을 듣지 못해 다음 주 시험 대비가 어려워진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누워 계시고 가족들이 울고 있는 그 장례식장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또 내 생각뿐이었다. 슬픔을 느낀 것도 잠시, 나는 다시 이기적인 나로 돌아갔다.


발인 전날 여든을 넘긴 할머니가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어하셨고 나는 밤 9시쯤 할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가 집에 혼자 계시게 하는 것이 걱정된 부모님은 할머니와 같이 집에 있으라고 하셨고 나는 거실 소파에서, 할머니는 당신 방에서 쉬셨다. 그렇게 있다가 할아버지 방이 보였다. 할아버지는 항상 거실에 있는 의자에 방석을 몇 겹씩 쌓아두시곤 앉아서 tv를 보셨다. 아니면 방에 누워 있으시거나. 가끔은 외출도 하셨지만 저녁 시간에는 항상 집에 계셨다. 그러니까, 그 늦은 시간에는 당연히 할아버지가 방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그런데 안 계셨다. 거실에도 화장실에도 할아버지 방에도 할아버지는 없었다.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이제는 당연한 그 풍경이 참 낯설었다. 들어가 본 적이 거의 없던 할아버지의 방에 들어가 봤다. 할아버지 옷, 할아버지 냄새, 어제까지 덮고 베고 주무신 이불과 베개까지 아직도 그 방에는 할아버지의 흔적이 가득했다.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느린 발걸음으로 들어오실 것만 같더라. 할아버지의 모든 것이 다 거기 있는데 할아버지만 없다. 한 번도 누워 본 적 없는 할아버지 침대에 누워도 봤다. 할아버지의 냄새가 났고 그곳에 누워 보니 가장 눈에 잘 보이는 것은 우리 외삼촌의 대학 졸업 사진이었다. 무뚝뚝하게만 보였던 할아버지는 항상 아들을 눈에 담고 싶으셨나 보다. 그리고 큰딸인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로 그랬다고 한다.


장례가 끝나고 할머니를 모시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할머니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엄마에게 그러셨다. 할아버지는 한 번씩 엄마가 집에 오는 순간을 항상 기다리고 계셨고, 엄마가 오지 않으면 오늘은 안 온다고 한 번씩 꼭 말씀하셨고, 엄마 차가 보이지 않는 날이면 어디 여행이라도 갔나 궁금해하셨다고. 나는 할아버지가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고 계실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앞으로 5년은 더 건강하게 사실 줄 알았던 우리 할아버지. 주무시듯 편안하게, 항상 잠들던 당신의 방에서 그렇게 가셨다. 항상 확실한 것을 좋아하셨다는 할아버지다운 그런 마지막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이별을 준비할 순간이 조금도 주어지지 않은 것이, 가족 중 누구도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채 혼자 방 안에서 돌아가신 것이 여전히 마음이 아프지만 그것마저도 항상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조금은 자기 자신밖에 모르시던 할아버지 모습 같았다.

마지막으로 가족들이 다 모여서 식사를 하던 날, 나는 할아버지가 기력이 조금은 돌아오신 것인가 생각했다. 최근에는 그러지 않으셨지만 할아버지는 가족들이 모이면 항상 어떤 맥락과도 상관없이 큰 소리로 정치 얘기를 하시며 민주당을 욕하셨다. 그러다가 지난 1년 정도는 계속 말이 없으셨는데 몇 달 전 식사 자리에서 오랜만에 그 얘기를 하시더라. 나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뜬금없이 타인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는 할아버지의 대화 방식이 싫었는데 오랜만에 들으니 그게 참 반가웠다. 타인을 미워하는 일도 엄청난 체력 소모를 요하는 일인데 그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기력이 다시 생기셨나 했다. 비록 내 생각을 틀렸지만 그 순간만큼은 안도했다.


장례를 치르던 3일 동안 날씨가 계속 맑았다. 평소같이 정정하시던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같았다. 다시 볼 수 없는 모습이지만 마지막까지 그대로셨던 할아버지를, 나는 그 날씨처럼 명확하게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치도 변함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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