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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고 싶었지만 너무 애쓰고 싶지는 않아요

밴드 브로콜리너마저의 곡 제목을 인용했습니다

by 권권우

브로콜리너마저의 공연 [이른 열대야]를 보고 왔다. ‘앵콜요청금지’는 중학생 때부터 꾸준히 플레이리스트에서 빠지지 않았던 곡이고 ‘졸업’은 몇 년 전부터 노래방 애창곡이었던 곡이다. 최근에는 ‘유자차’에 꽂혔다. 정말 좋아하는 밴드인 것은 맞는데, 사실 공연을 보러 갈 정도는 아니었다. 콘서트에서는 일반적으로 20곡 이상이 공연되고, 그중 아는 곡이 못해도 절반은 넘어야 콘서트를 재밌게 즐길 수 있는데 그 정도로 많은 노래를 알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엄마가 브로콜리너마저 콘서트 정보를 어디선가 듣고 같이 가겠느냐고 물었다. 티켓값을 엄마가 내주신다니, 그럼 안 갈 이유가 없지 (죄송합니다 어머니)


원래는 콘서트 셋리스트를 미리 파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생각지도 못한 노래가 선곡됐을 때 그것을 현장에서 확인하는 그 쾌감은 콘서트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라 해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건 내가 해당 가수의 노래를 거의 다 알고 있을 때나 해당되는 얘기고, 보통은 그렇지가 않다. 당연히 아는 노래가 많이 나오는 공연이 더 즐거운 법이고 내가 공연에서 신청곡을 넣을 수는 없는 법이니 공연을 즐기려면 미리 셋리스트를 확인해서 모르는 노래들을 아는 노래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급하게 콘서트 리뷰를 찾아 모르던 노래들을 플레이리스트에 넣고 듣는데,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노래를 새로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좋아하는 밴드의 모르는 노래들이라면 내가 좋아할 확률이 높지 않나. 물론 콘서트에서 선곡된 노래들을 다 플리에 넣고 계속 듣지는 않겠지만 꽤 많은 소득이 있었다.


공연 자체도 참 좋았다. 오랜만에 가 보는 소극장 공연의 분위기가 좋았고, 노래가 좋았고 라이브가 좋았으며 공연의 구성도 좋았다. 적당히 잔잔하고 적당히 신나고, 중간에 멤버들이 말도 안 되는 춤을 출 때는 치명적으로 귀여웠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을 하나 꼽으라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가사이다. 이번 공연의 특성인지 원래 브로콜리너마저 공연이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노래의 가사들과 멤버들의 멘트가 모두 모니터에 타이핑되어 관객에게 보였다. 브로콜리너마저의 가사들이 하나같이 모두 정말 아름답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라이브로 들으며 가사를 읽으니 그 의미가 훨씬 와닿고 몰입이 됐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그다음 날에는 이게 대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멈춘다면 나는 무엇이 되는 걸까?
모든 것은 닳아가고 시간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너무 애쓰고 싶지는 않다.
그때는 정말 몰랐었지만, 좋은 날들이었던 같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나는 지나쳐가는 것들을 덤덤히 넘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걸까? 혹 죽는 날까지도 그렇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럼 그렇게 되고자 애쓰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인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을 아주 놓고 싶지는 않지만 매달리고 싶지도 않다. 시간에 닳아가는 것을 꼭 슬프게만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시간에 닳아간 그 흔적이 누군가에겐 더 부드러워진 모습으로 다가설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그냥 천천히 오늘 하루만을 살아야겠다. 나중이 되면, 지금은 정말 모르겠지만, 좋은 날들이었던 것 같다고 말할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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