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 시 반,
간판 밑 사람들

젖은 새벽에 스민 어른의 무게

by 메종무던

노가다


비 오는 날은

내 몸의 박자를 늦춘다.

반박자쯤.


안단테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괜히 그 말이 떠오른다.

아마 이런 속도 아닐까.


빗속에서는 다 똑같다.

양복 입은 사람도

계절에 맞지 않는 남방의 나도

물에 번져 흐릿해진다.


가게주인도 직원도 학생도

우산 속에 고개를 파묻고

빗줄기 사이로 흘러간다.


나는

비 오는 날이 좋다.

온 세상이 느려지고

숨이 고르게 쉬어진다.


그 느림이 오래가면

내 하루는

젖은 땅 앞에서

서서히 식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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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이 되었을 때, 드디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은 이미 조급했고, 하루를 조금이라도 더 길게 쓰고 싶었다.

그렇게 나의 새벽 등교가 시작됐다.


AM 5:10 집 출발 – 5:40 학교 도착.

종이에 적힌 그 계획표는 보기만 해도 뿌듯했다.

새벽의 시간은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나만의 여백 같았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길을 걸으며, 나는 매일 나만의 하루를 먼저 열었다.


학교로 가는 길목에는 낡은 2층 건물이 하나 있었다. 1층은 인력사무소, 2층은 당구장이었다.

수능 영단어 1000개가 녹음된 무거운 카세트테이프의 A면이 B면으로 넘어갈 즈음, 나는 늘 그 건물 앞을 지나쳤다.

해가 막 떠오르는 시간, 그 앞은 언제나 북적였다.

통행을 막을 듯 커다란 가죽 소파가 하나 놓여 있었지만, 그 위에 앉은 사람은 없었다.

나이도 제각각인 사람들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믹스커피를 손에 들고 서 있었다.

그 새벽공기 속에서 나는 묘하게 묵직한 에너지를 느꼈다.

차가운 공기, 담배 연기, 그리고 짧게 오가는 인사들이 뒤섞인 풍경. 그렇게 매일 마주하는 얼굴들은 이름 없이도 익숙해졌다.


어느 날, 봄비가 며칠째 예보된 날이었다.

전날 밤부터 버스를 탈까 고민했지만, 결국 우산을 들고 길을 나섰다.

횡단보도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기 직전, 그 건물 앞에서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간판 밑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손바닥으로 받으며, 문 앞에 기댄 채 서 있었다.

그 손끝에 묻은 표정은 묘했다.

혹시나 비가 그쳐서 일이 잡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그리고 그 기대가 빗속에서 스르르 녹아내리는 허탈함.

실망과 설렘, 체념이 한꺼번에 섞인 얼굴이었다. 한 단어로는 다 담기 어려운, 어른의 얼굴.

그날 이후 수시 접수로 더 이상 새벽 등교를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와도, 한동안은 간판 밑에서 빗방울을 받던 그 손바닥이 종종 떠올랐다.


대학에 가서는 어려웠던 집 사정을 알기에, 용돈을 벌기 위해 여러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중 하나는 이벤트 회사였다. 고정 인력이 펑크를 내거나, 일손이 급하게 필요할 때면 연락이 왔다.

보통은 일주일 전에 통보가 왔지만, 당일 아침 갑작스럽게 호출되는 날도 있었다.

어느 날은 배구 경기장의 안내데스크에 앉았고, 또 하루는 콘서트장에서 관객들의 자리를 안내했다.

내가 해본 일 중 가장 수입이 짭짤했고, 그 시절의 나에게는 충분히 기다릴 만한 보상이었다.

동기들이 점심에 찜닭을 먹자고 할 때,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아도 당당히 자리를 지킬 수 있는 힘이었다.


용돈은 늘 빠듯했고, 일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대가 서서히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을 자주 맞이했다.

연락이 오지 않는 날이면 하루가 뚝 잘려나간 듯, 허전함이 스며들었다.

그 허전함 속에서 마음 한켠이 서서히 식어갔다.

마침 그 주에는 전공책을 사야 했던 터라, 공허함은 더 깊게 내려앉았다.

기대 끝에 남겨진 그 빈자리의 감정은, 묘하게도 그 봄비 속에서 보았던 그 표정과 닮아 있었다.


아마 그때 비로소 알게 된 것 같다.

어린 날엔 보이지 않던 어른의 무게를.

때로는 감춰야 하는 실망감,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야 하는 허탈함, 그리고 말하지 못한 슬픔들.

그 모든 것이, 그날 빗방울을 받던 손바닥과 함께 내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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