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제된 인생 구간은 없다
“비키니는 기세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오래 곱씹을수록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우린 종종 스스로를 가짜 구간에 가둔다.
시험을 준비하니까, 다이어트 중이니까,
“조금만 더 버티면 진짜 인생이 시작될 거야”라며.
그럴 때는 밥도, 여행도, 웃음도 뒤로 미룬다.
사진 속 웃음마저 예약해 두고, 지금의 나는 임시저장된 초안이라 여긴다.
삭제 버튼을 눌러놓은 듯 흘려보내지만,
돌이켜보면 그 순간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이미 내 인생의 본문이었다.
수험생 시절이 떠오른다.
친구들과의 1박 2일 여행을 포기하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선택이 가장 현명하다고 믿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의문이 남았다.
“정말 그렇게까지 벼랑 끝으로 몰아야 했을까?”
합격은 했어도 그 2년은 웃음도, 대화도,
밤늦은 삼각김밥의 소소한 위로도 빠져 있었다.
살아 있었던 나의 풍경은 공백처럼 비어 있었다.
다이어트도 하는 이 순간도 다르지 않다.
“50kg가 되면 비키니 입고 바다에 가리라.”
현실의 나는 오히려 10kg이 늘어난 상태.
친구의 여행 제안 앞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그때 문득 떠오른 말.
“비키니는 기세다.”
몸무게는 변해도 당당하게 웃을 기세는 내가 정할 수 있었다.
인생의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건 늘 내 잣대였다.
“지금은 가짜, 합격하면 진짜.”
“지금은 임시, 살 빼면 진짜.”
울면서 공부하던 나도, 살찌고 우울하던 나도,
그 시간 속에서 분명 살아 있었다.
삭제되지 않고, 고스란히 기록된 진짜였다.
이런 착각은 누구나 한다.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은 “회사 들어가면 진짜 시작”이라 말하고,
아이를 키우는 사람은 “조금만 크면 내 삶이 돌아오겠지”라 기대한다.
이직을 준비하며 “합격하면 다시 숨 쉬리라” 다짐하는 사람도 있다.
뒤돌아보면 그 시절에도 웃음이 있었고 눈물이 있었고,
분명한 나의 하루들이 있었다.
그 순간이 쌓여 결국 오늘의 내가 되었다.
이번엔 답장을 다르게 보냈다.
“그래, 가자. 나 비키니 입을 거야.”
해변에서 뱃살이 접히든,
사진 속 팔뚝이 굵어 보이든 상관없다.
그 모습까지 내 인생이니까.
인생에는 가짜 구간이 없다.
결과가 완성해 주는 게 아니라,
과정 속의 웃음과 눈물, 실패와 뱃살까지
모두 진짜가 된다.
오늘도 지우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내자.
어차피 비키니는 기세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