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진 옷소매처럼 남은 순간들

스쳐 지나간 작은 외면의 무게

by 메종무던

아침 공기는 아직 여름의 뜨거움을 간직하고 있지만

햇살 속에는 분명히 가을의 기운이 스며 있다.


계절이 완전히 자리를 잡기 전,

가을의 6분의 1쯤 되는 스쳐가는 지점.


더디게 다가오는 변화가 낯설지만 오래 기다리던 친구를 만나는 듯 반갑다.


미뤄 두었던 재킷 수선을 위해 길을 나선다.

이전 집에서는 골목만 돌면 닿을 수 있었던 단골 수선집이

이제는 20분쯤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


거리가 멀어졌지만, 그곳을 포기할 수는 없다.

내 옷습관을 더 잘 아는 사장님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낡은 옷감의 결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계절의 냄새까지 읽어내는 솜씨를 가진 배테랑.


재킷을 종이봉투에 담아 들고, 이어폰을 꽂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길 위에는 여름의 잔열과 가을의 기척이 뒤섞여 있다.


얼마쯤 걸었을까.

낯선 목소리가 불쑥 다가와 나를 멈추게 한다.

순간 본능처럼 시선을 피했고 발걸음은 자연스레 빨라진다.

이어폰은 낯선 부름을 차단했고 마음은 두꺼운 문을 닫듯 굳게 닫혀 버렸다.


잠시 후 이어폰을 귀에서 떼고 뒤를 돌아본 순간.

나를 불렀던 그 여자는 이미 내 뒤를 따르던 다른 행인에게 말을 걸고 있다.


버스터미널 방향이 이 길이 맞는지 묻는 단순하고 작은 물음.

그 광경을 확인하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순간의 판단으로 그녀를 종교 권유자쯤이라 여겼다.


낯선 부름 속에는 언제나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다는

오래된 불신이 작동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원했던 것은 그저 길 안내였다.


생각보다 단순하고, 생각보다 선량한 부탁이었다.


낯선 도시에서 길을 헤매다,

따뜻한 안내 한마디에 안도했던 내 경험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의 나처럼, 그녀 역시 작은 친절 하나면 한결 가벼워졌을 터였다.

그럼에도 그 순간의 기회를 스스로 흘려보냈다.


길 위에서 잠시 다정해질 수 있었던 찰나가

소리 없이 스쳐 지나갔다.


비슷한 기억이 하나 있다.


어느 출근길, 지각이 두려워 발걸음을 서두르던 아침이었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 멈춰 선 차 한 대.

창문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다급했다.


“아가씨, 잠깐 도와주세요.”


낯선 부름 앞에서 발걸음은 더 빨라졌다.

마음속에서는 혹시 모를 불안이 솟구쳤다.


횡단보도 앞에 도착했을 때,

뒤를 돌아보니 트렁크에는 휠체어가 놓여 있었다.

아마 그것을 꺼내 달라는 부탁이었을 것이다.


붉은 불빛은 여전히 신호등 위에 머물러 있었고,

곧 다른 누군가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나는 신호가 바뀌자 급히 길을 건넜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운전석 너머에서 비쳤던 난감한 얼굴은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 남아 떠나지 않았다.


살아오며 큰 잘못을 저지른 기억은 많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의도치 않게 남은 작은 잘못들이

예상보다 깊은 자국을 남긴다.


언젠가 내 삶을 재판할 때,

화려한 죄보다 이런 사소한 외면들이 모여

'천국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가 결론 나는 것일까.


종교가 없는 내게도 말이다.


작은 잘못은 구겨진 옷소매 같다.

멀리서 보면 잘 드러나지 않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분명히 남아 있는 산뜻하지 못한 자국.


시간이 흘러도 매끈히 펴지지 않는 그 불편한 주름은

오래도록 마음을 스친다.


그 주름이,

다음번에는 멈춰 서서 손을 내밀라는

조용한 신호가 되어 우리를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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