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비 끝의 맑은 하루에 대하여
비가 그치고 나서야 알았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소리가 비에 묻혀 있었는지.
창문을 두드리던 물방울의 리듬은 처음엔 다정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세상의 색을 모두 희석시켰다.
2주가 넘게 이어진 회색의 나날은 마음속 빛마저 젖게 했다.
그날 아침, 공기가 달랐다.
벽을 타고 흘러내리던 눅눅한 냄새가 사라지고,
햇살이 방 안을 채우며 먼지를 금빛으로 물들였다.
마치 오랜 기다림 끝에 조용히 약속된 순간처럼,
시간이 한 겹 벗겨지는 느낌이었다.
산길로 향하는 도로는 반짝였다.
젖은 나무들이 가지마다 물기를 매달고,
공기 속에는 이끼 냄새와 단풍의 예고가 섞여 있었다.
사람들은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
차들이 빽빽이 들어찬 주차장은
이 아침의 선물을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들로 가득했다.
길 초입의 흙은 물기를 머금은 채 부드러웠다.
발자국이 남으면 천천히 사라지고,
작은 물웅덩이마다 하늘이 담겼다.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왔고,
그 소리 위로 바람이 지나갔다.
한동안 가던 발길이 멈췄다.
빛이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손끝에 닿을 듯 투명한 공기,
그 안에서 새 한 마리가 조용히 날아올랐다.
그 순간 문득 생각이 났다.
기회라는 것은 어쩌면 이런 장면과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
불쑥 찾아오지만 오래 머물지 않고,
잡으려 하면 이미 한 걸음 앞서 있다.
많은 날들이 흐릿한 빗속에 묻혀 지나갔다.
더 준비되어야 한다는 핑계로 미뤄둔 일들,
이른 아침의 약속들, 용기 내지 못한 선택들.
그 사이에도 계절은 돌고, 마음의 온도는 서서히 식었다.
기회란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움직일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햇살이 비추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땅 위에 떨어진 낙엽이 밟힐 때마다
작은 소리가 퍼져나갔다.
그 소리가 마치 신호처럼 느껴졌다.
지금이다, 지금이 그때다.
모든 망설임은 이 순간을 위해 있었던 것 같다.
길 끝의 전망대에서 강물이 보였다.
며칠 전의 빗물이 아직도 흐르고 있었고,
빛을 받아 유리처럼 반짝였다.
그 광경 속에서, 모든 기다림의 이유가 정리되는 듯했다.
기회는 멀리 있지 않았다.
늘 이 자리에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잠시라도 맑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빛은 머물지 않지만,
그 짧은 순간이 우리를 다시 걷게 만든다.
기회를 잡는다는 건 결국,
그 한 줄기 빛 속으로 주저 없이 걸어 들어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