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니 여긴 에버랜드였어.
월요일 아침, 7시 반.
오피스텔 문을 나서는 순간, 나는 한 마리 ‘기린'.
길게 뻗은 목으로 세상을 내려다보지만, 사실은 오늘 하루를 버텨낼 마음의 준비를 하며, 차갑게 식어가는 아이스아메리카노의 초록 빨대를 무심히 씹는다.
아침밥은 이미 사치가 된 지 오래다.
카페인도 고갈 직전, 나도 고갈 직전.
회사 문을 여는 순간은 늘 예민하다.
목은 길게 뻗되, 결코 눈이 마주치지 않는 고도의 기술이 반드시 필요하다.
콧구멍을 살짝 벌름거리며 오늘의 공기—아니, 팀장님의 기분부터 읽는다.
그대의 기분이 흐리면 내 하루도 흐림.
점심 전까지는 지난주 발길로 밀어둔 업무를 쓸어 담느라 숨이 가쁘다.
이 끝없는 ‘일구덩이’는, 파도 파도 끝이 없는데, 묘하게도 메우는 일 역시 나의 몫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나=권대리=권 00은 a프로젝트를 수행하기에는 턱없이 작은 용량의 뇌를 가졌다.
진화가 덜 된 것이 분명하다.
뇌 메모리는 256MB인데, 회사는 4K 영상을 돌리라 한다.
화장실에 들어간 3분 20초 동안, 내게 이 프로젝트가 맞지 않는 이유만 줄줄이 떠오른다.
우선 거래처와의 껄끄러운 일을 먼저 마무리한다. 마음을 단단히 다잡는다.
방금 받은 메일은 겉으로는 정중했지만, 속내는 ‘다시 해오라’는 포식자의 눈빛을 품고 있었다.
유약한 속살을 드러내는 순간 물릴 수 있다.
틈을 허락하지 않는 단호함만이 오늘의 방패다. 우리는 서로의 부드러운 목덜미를 숨긴 채, 예의를 가장한 날카로움을 주고받는다.
동물의 왕국은 멀리 있지 않다.
그대가 사자이자 호랑이라면, 나는 라이거다.
이 회사가 빚어낸, 어딘가 기묘하고도 귀여운 유전자 조합.
그러니… 서로 조심하며 살아남자.
점심 이후에도 무리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애쓴다.
소중한 15분은 팀장 아들내미가 태권도 검은띠를 땄다는 이야기로 채워진다.
김대리는 타이밍 좋게 치켜세운다.
“태릉선수촌에서 탐낼 인재네요! 역시 팀장님 운동신경을 물려받았나 봅니다.”
나는 눈만 꿈뻑이며 오랑우탄처럼 머리를 긁적인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그 와중에 바나나가 당긴다.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와, 지난달부터 쌓아 올린 나뭇가지집 같은 보고서를 다듬는다.
겉은 그럴싸하지만 골조는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 그럼에도 과장님의 취향에 맞추느라 가지를 잘라내고 잔가지를 매만지고 덧붙인다.
최종 보고를 마치자마자 돌아오는 한 마디.
“방향부터 틀렸어, 다시.”
열심히 쌓아 올린들 무슨 소용일까.
나는 비버인데, 회사는 시그니엘을 지으라 한다.
집이 무너질 땐 물속에서 울 수밖에 없다.
공포의 4시를 넘어, 마침내 퇴근 시간.
핏이 완벽하게 떨어지는 코트를 걸치고 지하철에 오르자, 오늘 하루를 구질구질하게 만든 것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여의도 사람들은 내 코트의 가치를 알아줄 것만 같다.
제발 제발…
하지만 9호선 퇴근 지옥은 내 몸을 구겨 넣기 시작한다.
그래도 공작새의 깃털처럼, 코트 깃은 여전히 빳빳하다.
내 자존심의 마지막 방어선.
오늘도 무사히 버텼나, 스스로 묻는다.
집에 도착하면 이미 너덜너덜하겠지만, 영어회화 앱을 켠다.
하루를 숨 가쁘게 달려오다 보니, 이곳이 정말 ‘정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프로젝트만 무사히 끝내면, 판다처럼 대나무만 씹어도 예쁨 받는 송대리를 제치고 먼저 승진할 수 있을까.’
켜진 앱은 깜빡일 뿐, 어느새 집이다.
불닭볶음면과 삼각김밥으로 하루의 긴장을 풀고 소파에 몸을 기대 본다.
내일부터는 갓생을 살겠다고 다짐하며, 10시에 불을 끈다.
숲 속 ASMR 속, 나무와 바람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아침이 밝았다.
미라클 모닝을 꿈꾸며 눈을 떴지만,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아오, 알람을 왜 껐을까…”
시계는 이미 8시를 가리키고 있다.
어제 켜둔 동영상에서 새가 지저귀자, 정신이 번쩍 든다.
“에이씨, 정글은 무슨! 여기는 에버랜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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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몰랐다.
일이라는 게 결국 ‘관계’라는 미로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서바이벌이라는 것을.
숨이 막히던 어느 날, 그래도 웃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남겨둔 문장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