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가져다주는 행복
우리 회사 건물 아래에는 가천대학교가 운영하는 작은 도서관이 있다. 오늘은 점심 식사 후 잠시 들렀다. 책장은 정리가 잘 되어 있는 듯하면서도, 장르별로 철저히 구분된 대형 서점과는 달리 책들이 자연스럽게 뒤섞여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무질서함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우선, 대형 서점처럼 마케팅된 베스트셀러들이 보이지 않는 게 좋았다. 화려한 표지로 앞자리를 차지하며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소리치는 듯한 책들도 없었다. 도서관의 책들은 그저 조용히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광고도, 구매 압박도 없는 이곳에서 책을 바라보는 경험은 묘하게도 더 자유롭게 느껴졌다.
공간은 크지 않았지만, 다양한 장르와 작가들의 책이 함께 놓여 있었다. 대형 서점에서는 정해진 카테고리 속에서 내가 원하는 책을 골랐다면, 여기서는 책이 나를 먼저 부르는 것 같았다. 몇 년 전 인기 있었던 에세이, 잊힌 문학 작품, 이제는 절판된 학술서들이 같은 공간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최신 트렌드도, 베스트셀러 목록도 중요하지 않았다.
책을 고르는 과정도 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철학서 섹션에 관심이 갔다가, 그 옆에 놓인 인문학 책을 펼쳐 보게 되었고, 그러다 우연히 문학 코너에서 오래된 단편집을 발견했다. 의도한 것이 아닌데도, 예상치 못한 책과의 만남이 이어졌다. 마치 예전처럼 도서관을 거닐다가 우연히 책을 집어 들고 읽어 내려가던 느낌이었다.
그 순간, 문득 라디오가 떠올랐다.
예전에는 자기 전에, 운전하면서, 혹은 무심코 라디오를 틀곤 했다. 그러다 전혀 모르던 노래가 흘러나오면, 그 노래에 매료되어 한동안 찾고 헤매던 적이 많았다. 가수의 이름을 몰라 검색조차 어려운 상황에서도, 언젠가 다시 그 노래를 듣게 되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쁨을 느꼈다. 우연히 알게 된 음악이 익숙해지고, 내가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었음에도 빠져들게 되는 그 과정이 신비로웠다.
책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에는 도서관에서 예상치 못한 책을 발견하고, 그 책이 내 세계를 넓혀주는 경험을 하곤 했다. 하지만 요즘은 책을 그렇게 만나기가 어렵다. 내가 전공 서적 위주로 읽거나 관심 분야가 명확해진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책을 접하는 환경 자체가 변했다. 대형 서점에서는 관심 있는 분야만 찾게 되고, 온라인 서점의 알고리즘은 내가 과거에 읽은 책과 비슷한 책들만을 추천한다. 점점 새로운 장르나 주제를 발견할 기회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바쁜 생활도 한몫한다. 예전에는 서점에서 천천히 책을 둘러보거나,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며 우연히 새로운 책을 발견할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목적이 분명한 독서가 대부분이다. 필요한 책을 빠르게 찾고, 그조차도 시간이 부족해 온라인으로 주문한다. 그러다 보니 예상치 못한 만남의 기회가 줄어든다. 음악도, 책도, 우리의 관심사도 점점 효율적인 방식으로만 정리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 곳 작은 도서관에서는 그런 효율성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책장을 천천히 살펴볼 뿐이고, 책들은 그 자리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인기 순위도, 마케팅 전략도 없는 이곳에서의 독서는 오히려 더 자연스럽고 자유로웠다. 마치 라디오에서 우연히 들은 음악처럼, 책도 그렇게 ‘예상치 못한 발견’이 주는 즐거움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얻는 행위가 아니라, 새로운 생각과 우연한 만남을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점점 더 바쁜 일상을 살아가면서, 책을 고를 때조차 빠르고 효율적인 선택을 원하지만, 때로는 이렇게 아무런 목적 없이 책장을 훑어보는 시간이 더 가치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도서관에서의 짧은 시간이 주는 여운이 길게 남는다. 앞으로는 의식적으로라도 이런 시간을 더 자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