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나름 인정받는 커리어우먼이었는걸.
오늘은 남편의 회식이 있는 날. 엄마는 남편의 코 고는 소리도 익숙해져야 한다며 같이 자는 연습을 하라고 하지만, 나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임신 후기 임산부인 데다가 원래도 잠자리가 예민한 편이다. 남편이 술을 마시고 온 날이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크게 코 고는 소리에 잠에 들 수가 없다. 밤새 뒤척이고 잠들지 못해 다음날 컨디션이 깨지는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니, 남편이 회식이 있다고 하면 본가에서 자고 와야 되는지 고민부터 하게 된다. 하지만 그날은 다음날 오전 일찍부터 산부인과 진료가 있어 본가에 다녀오기도 애매했다. 그래서 남편에게 본가에 가지 않고 그냥 집에 있겠다고 연락을 하니 최대한 일찍 회식자리를 마무리해보겠다며 답장이 왔다.
난 내가 임신 후기라 몸도 많이 무겁고 불면증에 시달리는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술도 잘 조절하고 최대한 빨리 오겠지라는 기대를 했다. 그리고 빨리 들어온다고 했으니 11시 전에는 오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11시쯤에 집으로 출발한다고 연락이 왔고, 12시가 되기 좀 전에 남편은 귀가했다. 참고로 나는 독립적인 성향을 갖고 있어서 혼자 있는 시간을 외로워하거나 힘들어하는 스타일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혼자 있는 시간에 이렇게 글을 쓰거나 볼일을 보면서 나만의 방식으로 즐기는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번 남편이 늦게 들어온다고 뾰로통하거나 불만을 삼지 않는다. 남편 또한 불필요한 회식 자리는 최대한 줄이고 중요한 자리만 참석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머리와 마음은 다르다. 이성이 알고 있다고 해서 감정이 괜찮지 않은 법이고,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노력하는 마음이 고맙지만 나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내 삶의 변화에 비해 남편의 삶의 변화는 미미하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을 보면서 은근히 화딱지가 나는 듯한 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음악을 켰다.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멍하니 앉아있으니 복합적인 내 감정에 가려진 근본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그냥 만삭의 배로 집에 앉아서 남편을 기다리는 나 자신의 모습이 싫었던 것이다. 아무리 내가 혼자만의 시간을 잘 보내는 사람이라고 해도 점점 늦어지는 시간 속에서 '기다림'이라는 감정이 커진 것이다. 그리고 이 감정은 임산부가 되어 나의 커리어에 많은 제약이 생긴 내게 예전의 삶을 떠올리게 했다. 결국 나는 현재의 나와 임신과 결혼하기 이전의 나의 삶을 비교하며, 예전의 나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나는 패션업계에서 MD로 재직하며 나름 인정받는 커리어우먼이었다. 매출로 실적이 평가되는 MD세계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인정받을 만한 큰 성과도 이뤘다. 30대 초반, 한창 대리급으로 업계에서 러브콜이 많았던 전성기였다. 또한, 에너지가 많았던 나는 패션 MD로 배운 경험을 살려 20대 후반부터 온라인 패션 쇼핑몰을 오픈하고 회사를 다니며 투잡을 했다. 투잡이었기 때문에 쇼핑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었지만, 나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꾸준히 성장시켰다. 내 커리어도, 개인사업도 뭐 하나 아쉬울 게 없었고 마치 금은보화를 양손에 쥐고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고민하는 뿌듯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쇼핑몰이 많이 성장하면서 개인 사업에 올인해보고 싶다는 결심으로 회사를 퇴사한 23년도 6월에 임산부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타이밍이 참 아이러니하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임신하기 위해 퇴사를 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기막힌 타이밍이다.
하지만 누굴 탓하겠나. 속궁합이 잘 맞아 뜨거운 사랑을 했고, 축복의 아이가 생긴 것을. 결국 이 또한 나의 선택이고 책임이다. 물론, 합의되지 않은 타이밍에 생긴 이 축복이 남편의 큰 그림 같아서 얄미울 때도 많다. 내가 여자이다 보니 신체 구조적으로 이 큰 그림은 남편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 애초에 나는 결혼 생각도 아직 없었고, 엄마가 될 생각은 더더욱 없었기 때문이다. 그럴 거면 애초에 피임을 잘했어야지. 난 나 자신에게도 냉정한 편이다.
그리고 결혼 전 남편과 연애중일 때 친구를 만나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참고로 친구는 혼전임신으로 결혼해서 현재 아들을 낳았다. 그때만 해도 전혀 몰랐다. 그게 곧 다가올 내 미래인 것을. 고등학교 베프인 우리는 운 좋게 둘 다 속궁합이 잘 맞는 남자와 연애를 했다. 그래서 우린 만날 때마다 자주 그런 대화를 하곤 했었다. 그날도 역시 만나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던 중 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속궁합이 잘 맞는 연애의 끝은 뭘까?"
"임신, 그러니 조심해"
대답을 듣고 순간 멍했던 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우린 나란히 '엄마'가 되었다.
물론 나는 아직 출산을 2달 앞둔 예비 엄마지만 임산부가 된 이후 아무것도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예전의 삶을 잃어버린 관점에서 동일하다. 내 몸과 컨디션이 안 따라주기 때문. 그렇게 혼자만의 사색에 빠져있다 보니, 남편이 뭔지 모르게 늦어서 뻘쭘한듯한 표정으로 집에 들어왔다. 내 생각보다는 술을 더 많이 마신 듯한 모습. 남편을 보니 나만의 사색도 자연스레 멈췄다.
그리고 두 가지 새로운 결심을 했다.
첫째, 남편의 예상 귀가 시간의 기준을 정하지 말 것.
'11시쯤에는 오겠지'라는 나만의 생각이 11시 이후에 더 화를 돋운다.
둘째, 회식자리에서 최대한 빨리 온다는 남편의 말은 믿지 말 것.
최대한 빨리라는 기준은 각자 다르기 때문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