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1년, 수험기간이었던 고3을 제외한 고등학교 2년 동안 나는 큰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돌이켜보면 짧은 시간이었으나 사춘기를 겪은 꽤 민감한 시기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 생애 가장 중요한 시기를 큰집에서 보낸 셈이다. 큰아버지는 엄하셨고, 나는 밥상머리에서 젓가락질을 못한다는 이유로 그때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욕을 먹은 적도 있었다. 초등학교 때 통조림을 따다가 엄지손가락을 크게 다친 적이 있은 후로 나는 젓가락질을 잘 못했다. 큰집에 들어가 살기 전까지 나는 그것이 흉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손가락을 다쳐 아파하는 나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시선에서, 전후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저 모양이라는 큰아버지의 차가운 시선으로 순식간에 바뀌는 순간이었고 내가 '혼자'라는 생각을 강하게 한 계기가 된 일이기도 했다. 그건 어린 내게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중학교 때는 어렸기 때문에 큰아버지에게 반항을 전혀 하지 못했다. 큰아버지가 나를 꿇어 앉혀놓고 훈계를 하실 때면 나는 두 주먹을 꼭 움켜쥐고 입술을 여며 물었다. 내 그런 모습이 같잖았을 큰아버지는 더욱 나를 몰아세웠고, 아무 잘못도 없는 어린 사촌 동생들(큰아버지의 친자식들)까지 나 때문에 덩달아 혼이 날 때도 많았다. 나는 큰집에 더부살이하는 모양새였으나 전혀 기가 죽지 않고 사촌 동생들(큰아버지가 아버지보다 결혼을 늦게 해서 큰아버지 자식들은 나보다 어리다.)을 괴롭혔다. 큰아버지가 나를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나는 사촌동생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식으로 어린 사촌동생들에게 온갖 짜증을 다 냈고, 내 물건에 손도 못 대게 하고 까다롭게 굴었다. 사촌동생들도 크면서는 내게 당하지만은 않았지만, 나 때문에 정말 많이 울었다.
큰아버지 집은 인천이었고 나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때는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학교에 갈 준비를 했었다. 큰아버지가 나를 인천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을 오게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식의 말이 오갈 때, 나는 단호하게 전학은 가지 않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나는 완고한 큰아버지에 굴하지 않고 매일 새벽에 일어나 씻고 지하철을 타고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까지 아파서 결석은 했을지언정, 지각 한번 없이 학교를 다녔다.
지금은 무슨 일 때문에 큰아버지와 크게 다투었는지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고 나는 이미 머리가 커질 대로 커졌기 때문에 큰아버지의 억압적이고 다소 폭력적인 언행에 굴하지 않고 대들었다. 나는 큰아버지 말에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말대꾸를 했고 내 말은 누가 들어도 버릇이 없었으나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거침없었다. 큰아버지 손이 내 뺨을 치면서 큰엄마가 큰아버지를 막아섰고, 그런 큰엄마에게 큰아버지가 주먹을 휘두르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큰아버지는 나를 더 때리지 못하니 큰엄마에게 손찌검을 했고, 사촌동생들이 뜯어말리면서 일은 일단락되었으나 그날 큰엄마는 큰엄마대로 나는 나대로 충격을 받아 드러누웠다.
나는 서울에서 굶어 죽을지언정 더 이상 큰집에 있을 수 없다고 아버지에게 최후통첩을 하고 며칠 후에 짐을 싸서 아무도 살지 않아 냉골에다 지붕에서는 쥐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소리가 들리는 서울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큰아버지와 나 사이가 악화일로를 걸었고, 그 바람에 큰엄마와 사촌동생들과도 불편한 날이 늘어갔기 때문에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했다. 큰엄마도 더 이상 내가 큰아버지 밑에 있다가는 더 큰 사달이 날 거라 생각해 내가 서울에 가는 걸 막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가 고3 시기와 맞물리던 시기였기 때문에 더 이상 인천에서 서울까지 오고 가며 수험생활을 하는 것이 체력적으로 한계에 달하기도 했던 때였다.
큰아버지의 부고 소식은 코로나가 한창이던 작년 5월 8일에 들었다. 어버이날이기도 한 이날 일본 하시모토(橋本) 내 방에서 나는 큰아버지가 지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었다. 일본에서는 이때가 골든 위크(大型連休-일주일 정도의 연휴 기간) 때라 나는 집에 계속 있었고 이상하게 아침부터 머리가 무겁고 아파서 자리에 누워있었다. 내가 일본에 올 때는 물론이고 그 전에도 나는 큰아버지를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보지 못했다. 큰아버지가 병원에 입·퇴원을 반복하고 있고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는 요양병원에 있다는 소리를 들었어도 나는 큰아버지가 돌아가실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무슨 근거 없는 생각이었을까? 나이가 들고 병이 생겨 요양병원에 있을 정도면 언제 어떻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인데 나는 내가 큰아버지를 다시 만나 뵐 때까지는 적어도 살아는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 입국을 하기 위해 대사관을 비롯한 일본과 한국의 관계 기관에 연락을 했고, 코로나의 엄중한 시국에 한국으로 들어가게 될 경우 내가 갖고 있는 일본 비자가 취소된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언제 다시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었다. 무엇보다 큰아버지는 나와 직계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특별 입국자로 분류 자체가 되지 않아 나는 한국에 입국해도 14일 격리를 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일본 비자를 포기하고 한국에 입국한다고 해도 나는 큰아버지의 장례 일정 어느 한순간도 참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큰아버지 장례식조차 참석할 수 없게 되었고, 그것은 평생 가슴에 어떤 상처로 남게 될 것이다.
나는 큰아버지와의 기억에 남을 만한 좋은 추억이 별로 없었다. 내가 큰아버지에게 대들고, 말대꾸하고, 가슴을 후벼 파는 차가운 말들을 쏟아낼수록 큰아버지도 어린 내게 험한 말을 많이 하며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큰 상처를 주고받았다. 심지어 동네 교회에 숨은 거긴 하지만 나는 큰아버지를 괴롭히기 위해 큰집에서 가출까지 한 적도 있었다.
곰곰이 큰아버지와의 추억을 생각해보았다.
큰아버지가 위암으로 수술을 받아야 할 때,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나는 당시 내가 살고 있던 집 근처 대학병원으로 큰아버지를 전원(全院)하게 했고, 거기서 우연히 내 고등학교 선배를 만났다. 그리고 선배가 큰아버지의 주치의가 됐다. 내가 선배와 큰아버지를 사이에 두고 무람없이 일상의 이야기들을 주고받는 모습에 큰아버지가 굉장히 흐뭇해하셨다.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안정적이고 평온한 미소였다. 큰아버지의 주치의가 내 고등학교 선배라고 특별히 잘해 준 것은 없었으나, 큰아버지 시선에 나와 선배 사이의 다감함이 보기 좋았던 듯하다.
고등학교 1학년 어느 날, 새벽 별을 보고 큰집을 나가 밤하늘의 별을 보고 큰집으로 돌아오던 때였다. 그날은 마침 학교에 무슨 공사로 야간 자율학습을 1교시만 해서 나는 아직 어두워지지 않는 시간에 큰집에 돌아온 적이 있었다. 마침 그때 퇴근하고 돌아오는 큰아버지와 골목길에 마주쳤고, 큰아버지가 나를 보더니 무슨 생각이 났는지 무조건 따라오라고 해서 큰아버지 등짝만 보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한참 걸었던 기억이 있다. 여름이었는데, 큰아버지가 입고 있었던 연분홍과 노란색이 섞인 티셔츠가 기억에 남는다. 큰아버지는 환한 색깔을 좋아하셨고, 험한 일을 하는 것에 비하면 옷을 굉장히 잘 입는 편이셨다.
숯불구이 양념통닭집이었다. 큰아버지가 병맥주를 몇 병 시켜 마셨고, 나는 고추장 양념이 된 닭이 숯불에 구워진 매콤하면서도 담백한 통닭구이를 먹었다. 나는 사촌동생들 생각이 나서 큰아버지에게 동생들은 안 불러도 되냐고 물었지만 오늘은 너하고 나, 둘이서만 먹는 거라고 왼쪽 눈을 찡긋거렸다. 숯불구이 양념통닭집은 가게 출입문 양쪽으로 통유리가 있었고 그 안에는 쇠꼬챙이에 나란히 꽂힌 통닭들이 기름을 번들거리며 먹음직스럽게 익어가고 있었다. 가게 안은 숯불의 기운 때문인지 무척 더웠지만 큰아버지는 맥주를 몇 잔 마셔서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흔하게 먹는 양념통닭이 아니라 숯불에 구워 매콤한 고추장 양념을 묻혀 구운 닭고기였기 때문에, 닭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 입에도 딱 맞아 나는 그날 닭 한 마리를 내가 거의 다 먹었다.
큰 아버지는 땅콩을 안주로 맥주만 마셨기 때문에 통닭구이를 거의 먹지 않았다. 내가 큰아버지 드시라고 몇 번 권했지만 먹는다고 하면서 내게 많이 먹으라고만 했다. 영문을 몰랐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배가 고팠고, 이 맛있는 것이 사촌동생들 눈에 띄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없어질 것을 생각하니 염치도 없이 허겁지겁 먹었던 것 같다. 통닭집 주인아주머니가 내게 사이다를 한 병 따서 갖다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아드님이 아주 똑똑하게 생겼네. 똑 소리 나겠어요, 사장님. 얼마나 좋아? 저런 아들 하나 있으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겠네. 학생이 아버지랑 많이 닮았어. 많이 먹어, 무 좀 더 가져다줄까?"
큰아버지는 그저 허허 웃기만 했고, 나는 아들이 아니라 조카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런 말을 할 필요도 없었고 이미 아주머니가 무 그릇을 가지고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큰아버지 하고 내가 닮았다고? 어디가?'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큰아버지 주름 사이로 어딘지 모르게 숯불처럼 빨간 표정이 깃들어있었다.
그날 큰아버지와 내가 숯불구이 양념통닭집에서 마주 앉아 통닭을 먹은 것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는 일이었다.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나와 어떻게든 화해를 해보고자 애를 썼던 큰아버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었다고 지금은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그때는 왜 나를 어른들이 드나드는 술집에 불러서 조명도 빨갛고 노란 곳에, 미성년자는 출입하면 안 되는 느낌이 나는 통닭집으로 데려와 통닭을 사 먹였는지 잘 몰랐지만, 이제는 알 것도 같다.
그리고 내가 더 어린, 아주 아기였을 때 세상이 온통 푸르게만 보였던 그 시절이었을 것이다. 내가 태어난 걸 보고 큰아버지가 크게 기뻐하셨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이 실감이 안 되지만, 큰아버지에게는 첫 조카였고 권 씨 집안에 첫 핏줄이 탄생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어린 날에 나는 큰아버지가 무섭기만 했는데, 생각해보면 큰아버지도 나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꽤 무섭고 난감하고 곤란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든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며 큰아버지는 내 입을 통해서 ‘큰아버지’라는 소리를 처음 들어보았을 테니, 그 이름의 무게가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큰아버지 납골당 앞에 섰을 때, 큰아버지는 내게 무슨 말을 하실까. 그리고 나는 무슨 말씀을 올려야 할까.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큰아버지도 그러실까. 이제는 내가 큰아버지만큼 흰머리가 많아졌는데, 그런 내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하실까. 어릴 때는 참 예뻤는데, 커가면서 애가 아주 독종으로 변했다고 그러실까. 이제는 그런 말씀을 하셔도 나는 그저 웃을 뿐일 텐데, 그런 웃음을 한 번쯤은 보여드렸어야 했는데 하고 생각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