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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상혁 Dec 27. 2021

내 친구 규진이 1.

7. 새로운 시작.

 규진이(가명)와 나는 무려 3살 차이가 나는데도 친구로 지낸다. 내가 빠른 년생으로 학교에 1년 일찍 입학했고, 규진이는 어려서 병치레를 해 2년 학교에 늦게 입학했다. 중학교 1학년 때, 또래보다 좀 작은 나와 또래보다 성숙했던 규진이가 만났다. 규진이가 새 학기가 시작한 3월 말쯤 시골에서 전학을 왔다. 이미 한 달 가까이 같은 반 생활을 했던 아이들과는 친분이 생겨 무람없이 말을 주고받던 때였다. 담임교사가 전학생을 데리고 왔고 까무잡잡해서 촌티가 줄줄 흐르는 규진이가 교탁 앞에 섰다. 남루한 옷차림에 솜털이 아닌 어른처럼 검은 턱수염이 조금 자라 있어서, 반 전체 아이들의 눈이 규진이에게 쏠렸다.      


 눈을 아래로 깔로 더듬더듬 뭔가를 말하는데, 말투와 목소리를 듣고 나를 포함해서 반 아이들이 모두 자지러지게 웃었다. 호남 지방 사투리에 어눌한 말투가 서울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 눈에는 신기했을 것이다. 규진이는 그 후로 정말 무던히도 놀림을 받았다. 같은 반 아이들보다 나이가 2살이나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반 아이들은 전혀 형 대접을 하지 않았고 규진이도 바라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학생 신분 탓인지 규진이는 한동안은 분위기를 살피고 참기만 했다. 나는 창가 쪽 1 분단에 앉았고 규진이는 복도 쪽 4 분단에 앉았기 때문에 초창기에 우리가 서로 말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나는 그때 규진이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만으로 머리가 복잡했던 때이기도 했고 사춘기가 막 시작하던 시기여서 나 자신 이외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못 느낀 거 같다.    

  

 규진이와 내가 급속도로 친해지게 된 것은 사생대회에 갔을 때였다. 당시 ‘보라매공원’으로 사생대회를 간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5월이었고 보라매공원 호숫가에 벌레가 많아서 나는 교외 활동을 하는데도 별로 즐겁지 않았다. 그림에 소질이 있는 아이들이나 사생대회를 즐기지 나머지 아이들은 도시락을 까먹고 잡고 잡히면서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던 때였다. 규진이는 그날 돗자리를 가지고 왔었다. 공원 내 호숫가 주위로 빙 둘러서 의자가 갖추어져 있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반 아이들은 돗자리를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소풍으로 ‘보라매공원’을 자주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규진이는 그런 사정을 몰랐기 때문에 시골 학교에서 소풍 온 것처럼 돗자리를 가지고 왔던 것이다.   

  

 당연히 반 아이들이 서로 돗자리에 앉겠다고 난리를 부렸다. 1학년 전교생이 그날 모두 사생대회에 왔었다. 호숫가 그 많은 의자에 앉을자리가 없었고 아이들은 잔디 위나 심지어 맨바닥에 모여 앉아 그야말로 그림을 휘갈기고 있었다. 누가 보면 전위 예술가들(?)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성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사생대회를 총괄하던 미술 교사가 돌아다니면서 한숨을 푹푹 쉬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나고 ‘너희들 그림 안 그리고 뭐 하니?’라고 물어보면 바보처럼 빙그레 웃고 하얀 도화지에 끼적끼적 뭔가를 그렸던 거 같다. 한참 돗자리에서 장난을 치며 법석을 떨던 아이들이 돗자리에 흥미를 잃고 다시 넓은 공원으로 뛰어다닐 때, 돗자리에 누워 잠을 자고 있는 규진이에게 내가 말을 걸었다.     


 “그림 벌써 다 그렸어? 나도 다 그렸는데 여기 좀 앉아도 되니?”


 규진이가 아무 말이 없어 나는 그냥 돗자리에 앉았다. 호숫가 의자는 이미 누군가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다리도 아팠고 날도 점점 더워졌기 때문에 큰 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를 편 곳이 딱 쉬기 좋아 보여 나는 그냥 앉았다. 나는 돗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이름 모를 벌레들이 호수 위에 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구름은 둥둥 떠다니고 공기는 청명한데 나는 따분했다.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 뭔가를 끄적거렸다. 말도 안 되는 말들을 썼을 것이다. 


 반 아이들이 공원을 뛰어다니며 노는 것도 질렸는지 돗자리로 우르르 몰려와서 자고 있는 규진이를 톡톡 건드리며 장난을 쳤다. 꿈쩍도 안 하고 눈을 감고 있던 규진이가 벌떡 일어난 것은 누가 규진이 팔을 잡아 비틀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발톱을 숨겼던 것이겠지만, 그날 그 순간 규진이 입에서 튀어나온 호남 지방 욕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규진이가 쉬지도 않고 욕을 해대는데 처음에는 웃던 애들도 섬뜩했는지 표정이 굳어갔다. 규진이는 싸움을 잘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반 아이들보다 2살이나 많았기 때문에 애송이들 사이에서 제법 형 티가 났고, 하는 욕과 억양으로 봐서 만만치 않을 거라는 것을 어린 수컷들은 금세 알아차리고 꼬리를 내렸다. 아이들이 모두 물러간 다음에 규진이가 다시 돗자리에 누워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기지개를 켰다. 자기 손으로 쌌다면서 나에게 김밥을 같이 먹자고 했고, 규진이가 건넨 김밥은 꽤 맛있었다.     


 그 후로 우리는 단짝이 됐다.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같이 먹은 것은 물론이었다. 규진이는 나이와 등치에 안 맞게 도시락을 늘 뚜껑으로 반쯤 덮은 채 밥을 혼자 먹었다. 사생대회 이후로 가까워진 규진이에게 내가 먼저 도시락을 같이 먹자고 했다. 반쯤 가린 규진이 도시락 뚜껑을 내가 가로챘다. 그리고 내 반찬도 보여줬다. 김치와 콩자반 등 도긴개긴이었다. 규진이가 욕을 그렇게 잘하면서 의외로 도시락 반찬에는 수줍어했다. 내성적인 면도 있구나 싶어 나와 잘 맞는 친구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규진이와 친해지면서 나도 규진이에게 호남 지방 욕을 배웠고 사촌 동생한테 그대로 했다가 큰엄마에게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났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하는 욕이야 맨날 그게 그건데, 규진이는 욕을 아주 골고루 재미있고 찰지게 했다. 세상에 이런 욕도 있나, 하며 내가 놀라서 규진이를 쳐다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평소에 안 그러던 내가 가끔 규진이를 따라 한다고 욕을 하기 시작하자, 어느 날 담임교사가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중학교 1학년 때 담임교사는 24살에서 25살쯤 됐던, 대학교를 갓 졸업하고 발령을 받은 처녀 선생님이었다. 나는 담임교사를 무척 좋아했다. 선생님이 내 가정형편을 알고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그리고  ‘환경미화 대회’ 때 미화 부장이었던 내가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혼자서 일 하는 것을 보고, 학교 근처 분식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 떡볶이 같은 것을 사주었기 때문이었다. 교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처녀 선생님의 순수한 모습을 보는 것도 신기했던 때였다.          


 교무실 담임교사 앞에 서자 전에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엄한 표정으로 나에게 앉으라는 소리도 없이 훈계를 하기 시작했다.

 “너 요새 왜 그렇게 욕을 해? 교실에서, 복도에서 아주 가관이더라.”

 담임교사의 싸늘한 표정에 겁을 먹었고 무척 억울한 마음이 들어 눈물이 차올랐다. 나만 욕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는 반 아이들이 주야장천 입에 달고 있는 욕에 비하면 장난 수준에 불과한데 담임교사가 과하게 나를 꾸짖었다. 그렇다면 규진이도 불러서 같이 혼을 내야지 왜 나만 교무실에 불러서 공개 망신을 시키나 담임교사 원망을 했고, 나는 결국 옷소매로 뚝뚝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쳐냈다.

 “너 한번만 더 욕하는 거 선생님이 들으면 가만 안 둔다. 얘가 아주 정신이 나갔어. 가봐.”

 나는 담임교사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교무실에서 나와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교실로 돌아왔다. 규진이가 퉁퉁 부은 내 눈을 보고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왔지만 나는 입을 꾹 닫았다. 담임교사의 말은, 한 번만 더 규진이와 말을 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규진이와 짝꿍이었다. 사회 시간은 무섭기로 소문난 여자 교사였는데, 수업시간에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마대자루 같은 몽둥이로 사정없이 손바닥을 때렸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싸움 좀 하고 논다는 애들도 사회 교사는 엄청 무서워했고 수업 시간에 찍 소리도 못 냈다. 그런 사회 시간에 겁도 없이 규진이가 나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아마 꿍해있는 나를 달래 보려고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담임교사에게 혼이 난 상태라 마음이 마음 같지 않았다.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이 돌풍을 일으켰던 때였고, 누구나 ‘서태지와 아이들’을 좋아하고 따라 하던 시기였다. 규진이는 서태지의 왕 팬이었는데 책받침도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규진이가 ‘서태지와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에게 물었고, 나는 대답을 안 했던 걸로 안다. 사회 교사가 한참 수업에 열을 올리며 목소리를 높이던 때, 내가 규진이에게 그만 좀 말 걸라고 나중에 말하자고 한 마디를 했다가 하필이면 그 순간 사회 교사에게 포착되고 말았다. 참다 못 한 사회 교사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규진이와 나를 교실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마대자루 몽둥이로 각각 5대씩 맞았다. 두 대쯤 맞고 너무 아파서 내가 손을 빼자, 사회 교사가 뼈 부러진다고 이를 악 물고 참으라고 했다. 나는 그날 하굣길 마을버스 안에서 세상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표정을 구기며 울었다. 하지만, 규진이와 멀어져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규진이가 나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사회 시간에 매를 맞은 후, 짝이 바뀌게 되었다. 담임교사 지적이나 사회 시간에 있던 일도 있고 해서 나는 한동안 규진이와 거리를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규진이가 교실 책상에 엎드려 오열을 하는 사건이 생기게 됐다. 당시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교복을 입지 않고 사복 등교를 했다. 아침마다 입을 옷 때문에 걱정이 많았던 것을 기억한다. 두발도 어느 정도 여유를 둬서 남학생의 경우 앞머리가 눈썹을 덮지 않으면 된다, 정도의 교칙이 있었다. 규진이는 앞머리는 짧게 깎는 대신 뒷머리를 다소 길렀다. 얼핏 보면 뒷머리카락이 보이지 않는, 한 주먹으로 잡으면 잡힐 정도의 길이였다. 학생부(지금의 생활지도부)에서 교문 지도를 하는 시간을 피하느라 규진이는 새벽에 학교에 등교해서 제일 먼저 우리 반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갈 정도였다. 그토록 뒷머리를 기르려고 했다. 학생부 교사의 눈을 피해 새벽에 등교하는 규진이가 요령껏 단속을 피하다가, 그만 한문 시간에 걸리고 말았다. 한문 교사는 은퇴를 앞둔 꼬장꼬장한 할아버지였는데 엄하기로는 사회 교사 못지않았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사회 교사는 그나마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말을 하면 혼을 낸다는 타당한 이유라도 있었지만, 한문 교사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매를 때렸다. 당시는 그런 시절이었다. 나는 한문을 무척 좋아했지만, 한문 교사가 싫어서 한문 시간이 가장 괴롭다고 생각했었다. 규진이는 바로 이 시간에 오열을 하게 되는 사건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내 친구 규진이 2.」로 이어짐.                                                              

                                                                                                                   사진제공: H.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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