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 교사는 당일 진도 나갈 한문을 칠판에 적고 해석을 시켰는데, 못 하게 되면 채찍 같이 생긴 매로 사정없이 등짝을 휘갈겼다. 반 아이들이 바짝 긴장을 했었고, 한문 수업이 있는 날에는 등교하자마자 오늘 나가는 부분의 한문을 외우느라 정신이 없던 때였다.
규진이가 전학을 와서 끝 번호였기 때문에 웬만하면 걸리지 않았는데, 그날은 무슨 마가 꼈는지 수업시간마다 규진이가 지적을 받아서 뭔가를 발표해야 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문 시간에도 ‘끝번 일어나.’라는 한문 교사의 지시와 함께 규진이가 일어섰다. 칠판에 쓰여 있는 한문을 해석하라고 했다. 규진이도 한문 교사를 무서워했기 때문에 한문을 열심히 외웠고 시키는 대로 해석을 잘했다. 그러면 된 것이었는데, 갑자기 한문 교사가 규진이를 교탁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반 아이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일제히 한문 교사와 규진이를 번갈아서 쳐다봤다.
한문 교사는 규진이가 교탁 옆에 서자마자 뒷머리를 잡아채더니 쌍욕을 했다. 규진이가 하는 호남지방 욕과는 다른, 장난기가 싹 가신 차디찬 욕이었다. 규진이가 뒷머리를 잡아 채인 상태였기 때문에 상반신이 활처럼 뒤로 젖히게 된 모양이 됐다. 규진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건 물론이고, 나를 포함해서 반 아이들도 다들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눈앞에 광경에 시선을 모았다. 욕설을 중얼거리던 한문 교사가 이제는 규진이가 입고 있는 앞자락이 다소 긴 남방을 채찍으로 가리키며 시비를 걸었다.
“이 옷 좀 봐라, 어? 아주 서태지가 애들 다 망쳐요. 네가 서태지냐? 이 등신 새꺄? 어? 아주 남방이 바닥에 질질 닿아 바닥 청소하겠어? 머리 꼬락서니도 이 모양인데, 이 따위로 옷을 쳐 입고 맞아야 정신 차리지?”
그러고 몇 대 맞고 끝났으면 됐는데, 한문 교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겨우 중학교 1학년, 규진이가 아무리 반 아이들보다 나이가 2살 많다고 해도 그래 봤자 아직 아이였다. 어른이 아이에게 차마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한문 교사는 서슴없이 했다. 그것도 반 아이들이 다 지켜보는 앞에서.
“따라 해! 그러면 그렇지, 그렇고말고!”
규진이가 입고 있는 남방을 한문 교사는 채찍 같은 몽둥이로 볼썽사납게 들춰내면서 허벅지 앞쪽을 몇 번 후려쳤다. 한문 교사가 말한 ‘그러면 그렇지, 그렇고말고!’를 규진이에게 복창하게 했다. 규진이가 겁에 질린 것도 있었지만, 그 순간에 한문 교사에게 받은 모멸감에 규진이는 몸을 떨었을 것이다. 규진이가 입을 떼어 “그러면 그렇지.”까지만 물기 어린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하자 한문 교사가 다시 몽둥이로 규진이 머리를 후려쳤다. 어찌나 세게 내리쳤는지, 규진이 고개가 옆으로 튕겨졌다가 반사적으로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반 아이들 모두 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순간 눈을 감아버렸다. 대부분의 반 아이들도 ‘아, 이건 좀 심하다.’ 하는 표정들이었다. 개중에 야비하고 못난 몇 아이들이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이게 이제 보니 말도 못 하네! 어? 너 병신이야? 머리랑 옷 꼬락서니 보면……”
그 뒷말은 차마 여기다 옮기지 못하겠다. 나는 그 후로 ‘교사’라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교육자’인가라는 생각을 두고두고 곱씹어했다. 교사가 되면 안 되는 사람들이 교단에 서서 교사랍시고 교육을 하는 걸 보면서 분노를 넘어 역겨움을 느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진정한 ‘교육자’·‘교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것도 나를 맡은 담임교사가 아니라, 교과 담당 교사(수학)였던 분이었다. 훗날 내가 고등학교 교사가 되어 직접 찾아가 인사를 드린 유일한 선생님이기도 하고, 지금도 내 카톡에 ‘친구’로 등록되어 있는 단 한 분의 ‘은사님’이다. 나는 학창 시절부터 ‘교사’에 대한 반감이 강했고 커서 교사는 되지 말아야지 했는데, 그런 내가 고등학교 교사로 무려 8년 가까이 근무를 했으니 운명이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다.
한문 시간이 끝나고 규진이가 책상에 엎드려서 오열을 했다. 등이 후들거릴 정도로 울었다. 아이들 누구도 규진이를 건드리지 않았다. 다들 알고 있었다. 한문 교사가 너무 심했다고,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차라리 손바닥을 몇 대 때리고 말지 아이에게 해서는 안 되는 굴욕적이고 모욕적인 말을 서슴없이 했다고.
그때부터 어른들은 저런 거라고, 저런 게 어른들이라고 우리는 잘못 생각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사회 시간 이후 규진이와 내가 틀어지고 처음으로 나는 규진이에게 다가갔다. 뭐라고 위로를 해줘야 할지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고 나도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쉬는 시간 10분 동안 나는 그저 후들거리는 규진이 등을 토닥일 뿐, 그 외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규진이를 졸졸 따라 규진이 집으로 향했다. 규진이도 우리 집보다 형편이 더 나빴으면 나빴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내가 규진이에게 먼저 사과를 했다. 그냥 사과를 하고 싶었다. 내가 한문 교사도 아닌데 한문 교사 대신 사과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미안해, 규진아. 나는 안 웃었어. 웃은 애들 별로 없었어. 다들 너 걱정하고…….”
규진이가 가방을 내려놓고 찬물을 틀어 ‘어푸어푸’ 세수를 했다. 나는 가방 줄을 괜히 꼬면서 규진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한문, 진짜 노망 났나 봐. 그러니까…….”
규진이가 수돗가에서 세수를 마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망난 늙은 영감탱이. 벼락 맞아 뒈질 거야.”
“뭐라고?”
“벼락 맞아 뒈질 거라고!”
내가 먼저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나도 규진이 말투를 그대로 흉내 내 소리쳤다.
“맞아, 그 영감탱이 벼락 맞아 뒈질 거야! 뒈질 거야!”
수돗가에서 규진이와 내가 마주 보며 한문 교사 욕을 마구 해댔다. 한문 교사 욕이 끝나자 사회 교사 욕을 하기 시작했고 우리를 둘러싼 어른들 욕으로 이어졌다. 그때 어른들은 우리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조금만 관심을 갖고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봤으면 그날과 같은 참혹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는 제대로 된 어른들을 만나기 어려웠고, 만났다 하더라도 오랜 시간 같이 있을 수 없었다. 우리는 어른들에게서 ‘해서는 안 되는 말이나 행동’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배웠다. 교과서에 나와 있는 대로「발달 교육과정」에 따라 세상을 배운 것이 아니라, 못난 어른들을 보고 못난 세상을 배워갔던 시절이었다.
중학교 1학년을 제외하면 규진이와 나는 같은 반이 된 적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수업이 끝나면 각자의 교실 앞에서 기다렸다가 같이 하교를 했다. 집 방향이 달라서 교문 바로 코앞에서 헤어져야 했는데도 그랬다. 가끔은 규진이네 집에 가서 규진이가 묵은지 김치를 볶아서 넣은 밥을 비벼줬는데, 나는 그 밥이 그렇게 맛있었다. 규진이는 호남 지방에서 나고 자라서 그런지 규진이 손만 닿으면 별것도 아닌 음식이 굉장히 맛이 있게 변했다. ‘너는 요리사 하면 되겠다.’라고 내가 항상 말을 했다. 그 정도로 맛깔스러웠다. 규진이가 비벼주는 밥이 먹고 싶어서 일부러 하굣길에 규진이 집까지 따라가서 놀다가 집에 늦게 들어간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에게 혼쭐이 났지만, 우리의 우정은 계속됐다.
내가 인문계로 규진이가 상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물리적으로 우리는 좀 더 멀어졌다. 하지만 규진이 집이 마음만 먹으면 30분 내로 갈 수 있는 거리였고, 내가 그때 다녔던 대형 학원이 규진이 집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학원이 끝나면 잠깐 규진이와 밖에서 만났다. 그때 동네 분식집에서 떡볶이 같은 걸 시켜놓고 서로의 학교생활에 대한 고충을 털어놓았다.
규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취업을 할 거라고 했다. 대학을 진학하려고 하는 나와는 진로가 더욱 멀어졌기에 서로의 공통점이 점점 사라지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만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이 되고 서로 마주 앉아 아무 말이 없이 있어도 편하기만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대학에 진학했고, 규진이는 제법 큰 규모의 식당 홀 서빙 일을 시작했다. 홀 서빙 일을 시작하고 반년이 지나 규진이가 군대에 갔다. 평소에는 규진이와 내가 3살이나 차이가 난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다가, 이런 행정적인 절차를 앞에 두면 규진이가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을 깨닫고 낯설어질 때가 많았다.
규진이가 군에 있는 동안 나는 면회를 한번 갔었다. 그마저도 전날 학과 동기들하고 술을 먹다 늦잠을 자고 예정됐던 아침 기차를 놓치는 바람에 다 저녁이 되어서야 규진이를 잠깐 볼 수 있었다. 사실은 술이 깨지 않기도 했고 늦잠을 자서 기차를 놓쳤기 때문에 면회를 안 가려다가, 그런 내 모습을 보던 아버지가 한 말씀하셨다.
“그게 그런 게 아니다. 군대에 있으면 사람이 얼마나 그리운데. 면회 간다고 했으면 가야지. 얼마나 기다리겠어. 사람이 그러면 안 된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양심의 가책을 느껴, 부랴부랴 일어나서 다시 기차표를 사고 경남에 있는 규진이가 복무하는 군대에 갔었다. 내가 너무 늦게 부대에 도착하는 바람에 규진이는 외박을 나오지 못했고, 우리는 부대 내에서 잠깐 얼굴을 보는 걸로 아쉬움을 달랬다. 규진이에게 너무 미안했지만, 규진이는 흔히 겪었던 일이었는지 별로 상심하지 않은 눈치였다. 내가 서울에서 경남까지 와 준 것만으로도 무척 고마워했다. 그래서 나는 규진이에게 더 미안해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세월이 지나 규진이가 군에서 제대를 하고 내가 군대에 갈 때가 되었다. 나는 논산 훈련소로 신병 훈련소가 지정이 되어 논산으로 가야 했다. 규진이가 식당 일로 바쁠 텐데도 월차를 내고 내가 훈련소 가는 길을 함께 했다. 내가 군에 입대하는 전날, 아버지는 양복을 차려입고 서울역까지 나를 배웅했다. 평소에 양복을 잘 안 입는 아버지가 양복까지 차려입고 내 앞에서 잘 다녀오라는 말을 했을 때는 눈물이 쏟아졌다. 규진이가 아버지에게 걱정하지 마시라고, 상혁이 잘 데려다주고 오겠다고 했다. 우리는 같이 기차를 타고 논산에 갔고 논산 훈련소 근처에 있는 여관에서 하룻밤을 잤다. 내가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불안해서 잠을 못 자고 있으면 규진이가 군대에 먼저 다녀온 사람답게 푹 자 둬야 내일 편하다고 일러줬지만, 나는 한숨도 못 자고 끝내 하얗게 새벽을 맞이했다.
다음 날, 훈련소 입소 전에 먹는 마지막 아침 식사를 어느 식당에서 규진이와 같이 먹었다. 내가 잘 먹지 못하자 규진이가 지금 안 먹으면 훈련소 들어가서 반드시 후회한다고 해서 나는 내 앞에 있는 음식을 꾸역꾸역 다 먹었다. 그리고 입소 전 마지막으로 훈련소 앞에 있는 이발소에 들러 머리를 밀었다. 미장원에서만 머리를 깎다가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는 것도 낯설었고, 이발소에 들어서자마자 코끝을 찌르는 ‘남성 스킨’ 냄새에 나는 피부에 안 맞는 스킨을 얼굴에 바른 것처럼 어딘가가 따갑고 아파, 인상을 잔뜩 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