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소리에 아침이 오는 소리를 듣지 못한 날.

8. 일상의 평온함을 바라며.

by 권상혁

금요일 퇴근길, 동료 교사 몇몇과 학교 근처 고깃집에 둘러앉았다. 나이도, 경력도, 가르치는 과목도 다른 이들이었지만,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돼지 목살 익어가는 소리를 배경으로 우리의 이야기는 이내 한 곳으로 모였다. 바로 '아이들'의 이야기였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저마다의 스트레스와 고민을 안고 살아가겠지만, 우리가 이토록 빠르게 한마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마 아이들이라는 공통의 화두를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학교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을 공유하고, 저마다의 해법을 모색하다가 때로는 서로 다른 교육관으로 부딪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 충돌과 타협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나와 다른 동료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또 한 뼘 성장해 가리라 믿는다.

이야기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게 이어졌다. 창밖으로 후드득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빗소리에 묻혀 우리는 새벽빛이 창틈으로 스며드는 줄도 잊은 채 아이들 이야기로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새벽 어스름에 지친 몸을 이끌고 가게를 나설 때였다. 밤새 우리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계시던 가게 주인아주머니께서 계산을 마치고 돌아서는 내게 다가오시더니, 온 힘을 다해 나를 와락 끌어안아 주셨다. 예상치 못한 행동과 아주머니의 따뜻한 온기에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잠시 그저 가만히 안겨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안주를 시키는 것도 잊어버리고 이야기에 열을 올리는 사이, 아주머니께서는 여러 가지 간단한 안주를 채워주시기도 했다. 훌쩍 커버려 기특한 아들 등을 토닥이듯, 아주머니께서 내 등을 토닥이며 다소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고마워요. 우리 아이들… 우리 아이들, 사랑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 한마디에 밤새 억눌렀던 감정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옆에 동료 교사가 지켜보고 있어 북받친 감정을 얼른 삼켜버렸지만 말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몇 시간 동안 나는 아이들 이야기에 울고, 웃고, 분노하고, 절망하다, 다시 작은 희망을 품어 보았다. 누군가 옆에서 지켜봤다면 혼자서 희비극을 연기하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아주머니의 따뜻한 체온과 한마디는 꾹꾹 눌러 간신히 버티고 있던 내 과거의 출렁이는 감정선 하나를 건드렸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결코 남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 그 아이들의 사소한 이야기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게 되는 이유는 어쩌면 내 과거와 맞닿아 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가난하고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힘겨운 날들 속에서 소중한 것들을 잃기도 했고, 그러다 나 자신마저 잃어버릴 뻔한 위기의 순간들을 여러 번 거쳤다. 삶의 궤도에서 밀려나지 않으려 발버둥 치며 겨우 여기까지 왔다. 그래서일까, 위태롭게 흔들리는 아이들을 보면 차마 외면할 수가 없다.


내가 그 아이들의 아버지도, 엄마도, 하다못해 먼 친척도 아니지만, '선생'이라는 이름으로, '교사'라는 이름으로, 그저 붙잡아 주고 싶다. 내 손이 닿을 수 있을 때, 더 늦기 전에, 아이들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리기 전에 말이다. 무서운 세상의 손길에 채 펴보지도 못한 아이들의 꿈이 무참히 짓밟히기 전에, 그 꿈을 함께 찾아주고 지켜주고 싶다. 선생이라는 역할을 떠나, 그것이 어른의 역할이 아닌가 싶다.


그날 밤, 나는 미약한 내 존재가 너무나 서러워 눈시울을 붉혔다. 술을 마셨지만 취하지 않았고, 쏟아지는 새벽 비를 맞으며 한동안 어두운 길을 걸었다. 내 아이들이 걷는 걸음이 이런 어둠 속일까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무거운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질문이 맴돌았다.


'교사인 나는, 결국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대체 무엇인가. 나조차 이렇게 흔들리며 살고 있는데 내가 누구를 가르치고 지킬 수 있다는 말인가.'


스스로가 너무나 부끄러웠다.


아침 첫차에 지친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깜빡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아이들이 나를 향해 애타게 손을 뻗고 있었다. 나 또한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그 손은 끝내 아이들에게 닿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우리 아이들에게 손을 뻗어볼 것이다.

끝내 닿지 않는 손이라 할지라도, 힘껏 내밀어 볼 것이라 조용히 다짐해 본다.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일이고 역할이라 생각하며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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