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인가? 사랑인가?
. 남녀 간의 사귐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
이 시대 “혼전순결” 용어 자체가 거부되는 세상이다. 하지만 또 많은 청춘들이 결혼 울타리 밖에서 일어나는 성관계로 고민을 하고,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것도 현실이다. 지금 한참 연애를 하고 있는 청춘들에게 철 지난 영화이기는 하지만 개봉 당시 세상에 화재를 일으켰던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2년)” 와 “아내가 결혼했다(2008년)”라는 영화를 한번 보라고 권하고 싶다. 연애를 잘하려면 롤코(로맨틱 코미디)를 좀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사람들이 보고 공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고, 나도 결국은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개봉한 지 15~20년 정도 지난 현재 시점에서 결혼 밖의 성관계를 보는 정서는 두 영화의 중간쯤 지점에 와 있는 것 같다.
잠깐 영화의 스토리를 소개해 본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결혼과 연애를 별개의 일로 생각하는 엄정화(연희역)가 감우성(준영역)과 달콤한 연애를 하면서 또 다른 누군가와 결혼하는 사건을 스토리로 하고 있다. 보통 이런 이야기의 갈등은 불륜 상대를 둔 부부간의 갈등에 집중하는데 이 영화는 부부의 갈등이 아니라 이미 결혼을 한 여인과 그 여인의 동거남 과의 갈등에 포커스를 두고 있다. 심지어 염정아의 남편은 누구인지 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 주제를 다루고 있다. 모든 것이 너무 잘 맞아서 손예진(인아역)과 결혼을 한 김주혁(덕훈역),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손예진은 한 사람만 사랑하고는 살 수 없다고 선언하고, 또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고 서울과 부산으로 두 집의 아내가 되는 설정이다. 자신의 아내가 또 다른 누구와 연애가 아닌 결혼을 했다는 갈등 구조이다.
개봉한 지 벌써 15년 지난 영화임에도 우리의 성 의식 변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힌트를 주고 있다. 이전 우리 부모들 세대에는 남녀가 결혼 전에 함께 자는 것(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큰 수치라고 생각했고, 주변에서 그런 일이 있다면 동네 구설에 오르기 일쑤였다, 하지만 현재 청춘들의 보편적 성인식은 이와는 좀 거리감이 있다. 아직까지는 극적인 대칭점에서 두가지 입장이 혼재하고 있지만, 이시대 혼전순결을 고수하는 편에 선다는 것은 좀 특별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아직도 사회 정서상 결혼 전 임신에 대한 부적정 생각이 남아 있고, 혼전 성관계라는 것이 임신에 대한 안전지대를 보증하기 어려운 현실이 남아 존재하기에 성관계를 전제로 한 자유 연애를 완전히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 남녀 사랑의 매개체 - 성적 매력
남녀가 서로에게 끌림(매력)을 느끼게 되는 데 성적 매력은 필수 요소다, ‘나는 플라토닉 한 사랑을 추구해’라고 주장을 한다면 그 경우는 플라토닉 한 정신세계에 대한 패티쉬가 있는 경우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성교제에는 스킨십은 피할 수 없는 필수 요소이다. 스킨십은 결여된 반쪽을 향한 잠재적 동경심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이대목에서 어린시절 접했던 "이가빠진 동그라미" 라는 그림책이 생각난다.
이성 교제에는 스킨십에 대한 암묵의 기대가 있다. 예를 들면 만난 지 한 달이면 손은 잡아줘야 되지 않을까?, 100일 이면 입맞춤 정도는 할 수 있지? 사귄 지 1년이 지나도록 키스도 못 했다면 좀 문제 있는 것 아니야? 등의 기대를 갖는다. 하지만 이런 암묵적 기준에 절대적 가이드는 있을 수 없다. 두 사람의 친밀도, 신뢰도가 이 수준과 단계를 결정하는 거야. 그리고 그 단계를 조율해 가면서, 긴 인생에서 함께할 사랑을 찾고, 키워가는 것이다.
그런데 명심할 것이 하나 있다. 스킨십에는 단계가 있고 단계의 진행은 거의 절대적으로 일방통행이라는 것이다. 한번 진입한 단계에서는 그 아래 단계로 되돌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단계를 되감기 한다는 것은 교제를 그만두는 것을 선언하는 것과 같을 수 있다.. 만약 이 단계를 되돌릴 정도의 자제력과 이성으로 본능을 조절할 수 있는 절제력이 있다면, 차라리 진도를 빨리 빼지 않는 편이 훨씬 현명한 선택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사실혼과 법정 혼을 문화적 합의로 하고 있다.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가 문화인 곳에서는 이런 혼인 관계 안에서의 일대 다자간 성관계가 인정된다. 인류는 시대적 한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공동체적 합의에 의해 도출된 결혼 제도를 만들어 왔다. 왜 문화적 합의가 중요할까? 결혼의 본질은 상호 돕는 자(배필)가 하나가 되는 것이고, 문화적 합의하에서만 이것은 상호 간에 지켜지고 공동체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연애하는 청춘을 위한 스킨십 가이드라인
청춘 시절 같은 고민을 했고, 결혼 후 27년을 살고, 또 두 자녀는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이 시대 청춘들의 연애사에서 스킨십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볼까 한다.
1. 안전선 : 가벼운 입맞춤
가벼운 입맞춤도 처음 경험하는 관계에서는 매우 자극적인 단계이다. 기대되고 설레지만, 신체적 쾌감보다는 정신적 교감이 조금 더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단계이다. 그래서 이 단계에서는 이성이 본능을 제어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는 속도 조절이 가능하다. 만날 때마다 키스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2. 위험선 : Deep Kiss (격렬한 입맞춤)
이 수준이면 육체적 갈망을 이성적으로 통제하기 쉽지 않다. 물론 불가능하지 않지만. 그만큼 고통도 있다. 그리고 지속적인 자극 강도의 강화를 요구하게 된다. Deep Kiss는 그다음 단계로 멈춤 없이 진행된다. 단지 속도 조절만 가능할 뿐이다. 이 단계에 있다면 최대한 진행 속도를 늦출 것을 권한다. 서로의 관계에 대한 확신, 결혼에 대한 계획이 있다면 그 시기를 고려해서 마음에 다짐을 하는 것이다. 물론 마음같이 될 것 같으면 위험선이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단계이다.
3. 경고선 : Sex 이전의 단계
이 단계는 단지 법적인 책임만 회피할 뿐이지 성교와 다르지 않다. 한때 사회에 이유가 됐던 부적절한 관계는 있었지만 성행위는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미국의 유명한 성스캔들 사건을 계기로 비슷한 상황에서 면죄부를 받기 위해 사용한 표현이다. 이 단계에 있다면 결혼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4. 최후 보루선 : 실제적인 Sex
대한민국의 제도는 법적 결혼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성관계로 인해 생기는 수많은 위험(Risk)상황을 긍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 수많은 위험에는 육체적,정신적 피해 뿐 아니라 금전적 피해까지 포함된다. 법적인 혼인을 이룰 수 없는 다양한 현실적 문제가 있다고 해도 둘사이에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다면 결혼에 준하는 책임과 의무를 감수해야 한다.
혼외정사, 즉 혼인한 사람이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갖는 성행위는 바로 몇 년 전인 2015년 간통죄가 폐지 전까지만 해도 명백한 범법 행위였다. 간통죄 폐지가 자유로운 사랑이라 명분으로 혼외정사의 정당성을 보장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건 형법상의 면죄부일 뿐, 여전히 민사상의 대가는 남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가장 소중한 자아를 공유했기에 그에 걸맞게 상대를 보호해 주는 것 까지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둘만의 은밀한 관계는 법적 안전망의 테두리를 벗어났을 경우 둘만의 은밀한 비밀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결혼 관계도 이혼의 파경에 이룰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안에서는 어찌 되었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포기할 수 없다. 하지만 결혼 밖의 사랑은 이런 공식적인 안전망이 전혀 없다. 오직 두 사람만이 지킬 수 있는 보물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성관계 경험을 무용담 삼아 자랑하고 다니는 경우를 가끔 경험한다. 그건 정말 끔찍한 폭행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사랑하는(사랑했던) 사람이 누군가와 같이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아픈 일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나눈 가장 은밀한 교감을 세상에 떠벌리고 다닌다는 것은 상대방을 알몸으로 세상에 떠미는 것과 같은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 청춘 커플에게 주는 제안
상대방의 혼전 성 경험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나는 누군가의 미래의 남편이고, 아내이다. 내가 상대방에게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수준이 내가 지금 해도 되는 스킨십의 수준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한 때는 이 기준을 남자, 여자를 따로 생각하는 문화가 있기도 했지만, 이 글을 쓰는 현재 시점에서 남자, 여자의 차이는 그 기준을 따로 생각하는데 적절하지 않다. 남녀 간 성관계의 경계 기준에 차등을 두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우리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 분명한 현실 하나는 스킨십의 단계를 한 단계 낮은 단계로 되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