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의 중심부는 정해진 게 아니라, 내가 정하면 되는 거 아냐?
#1
2018년 2월 29일, 내 인생 첫 인턴 월급을 받으며 이런 다짐을 했다.
매 달 월급 50만 원을 저축해서 300만 원을 만들자. 그리고 인턴이 끝나면 유럽으로 떠날 거야.
그렇게 내 인턴 생활은 6개월을 넘어 8개월을 향해가고 있고, 올해 12월, 11개월 차 즈음에 내 인생 첫 인턴 생활이 마무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내 수중에 남는 돈 550만 원. 막연하게 꿈꿨던 유럽 한 달 살이가 점점 손에 잡히는 일이 되어갔다.
#2
2018년 9월 17일, 항공권을 끊었다. 마음먹고 여행 준비를 시작하고 보니, 너무 많은 선택의 상황들과 마주해야 했다. 미국의 포틀랜드와 포트투갈의 포르투. 두 가지 선택지가 눈에 들어왔다. 포틀랜드를 선택하자니, 포르투가 눈에 밟혔고 포르투를 선택하자니 포틀랜드가 눈에 밟혔다.
한 달이나 되는데, 포르투 갔다가 포틀랜드로 한 번 더 비행기 타면 안 돼?
라는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천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장 스카이스캐너로 티켓을 검색해보았는데 전체 여행 예산의 1/3 정도 되는 금액이 찍혔다. 그렇게 바로 포기. 거기다 겨울 포틀랜드는 너무 춥다는 친한 동생의 얘기를 듣고, 포르투로 마음이 조금 더 기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포르투로 결정이 나는 듯하더니, 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실 생각보다 마을이 작고, 촌동네라 관광하기엔 별로 좋지 않을 수 있다.라는 얘길 어디선가 또 주워 들었기 때문.
에버노트를 열고, 포르투로 떠나고 싶은 솔직한 이유를 하나씩 적어 내려갔다.
이 정도면 누가 무슨 말을 하던, 흔들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17일 월요일, 벌초 다녀온 다음 날의 휴가에.
반나절의 시간을 항공권 스캔에 쏟았고, 백 만원이 조금 넘는 포르투 in, 파리 out 항공권을 끊었다.
#3
나는 항상 여행 준비를 철저히 하려고 했다. 한두 푼이 아닌 돈을 써야 하고, 그렇다면 최고의 여행 경험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래서 특히 숙소나 항공권 선택에 굉장히 신중했고 많은 시간을 쏟았다.
처음엔, 이번에도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좋은 숙소를 잡아야 한다는 부담감과 당장 내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선택지들. 그것들을 하나하나 매의 눈으로 스캔하고 있자니, 어느 순간 스트레스가 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행복하자고 시작한 여행인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내 모습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엔 마음을 조금 놓아보기로 했다. 이것저것 너무 예민하게 따지지 말고, 내 마음이 향하는 대로 가보기로.
이번 여행 컨셉은
스트레스-프리 입니다.
그렇게 걱정은 조금 덜어두고, 이 곳을 선택했다.
포르투에서 3주간 내가 머무를 공간.
호스트가 함께 살고 있는 집이었고, 나쁜 후기가 단 하나도 없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기 때문에, 따뜻한 홈스테이 느낌이길 바랐다. 지금 살고 있는 자취방의 채광이 좋지 않은 편이라, 이 번 한 달 살이 만큼은 아침에 눈뜨면 햇살이 들어오는 공간에서 지내고 싶었다. 그리고 이 곳은 모든 조건을 만족시켰다.
중심부에서 도보 20분 떨어진 거리에 있지만, 이건 나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난 여행의 기억들을 더듬어보면, 나는 소란스러운 중심부보다는 약간 떨어진 조용한 동네를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지난 오사카 여행에서도 그 유명하다는 도톤보리에서 피로감을 너무 많이 느꼈고, 결국 가라호리라는 조용한 동네를 찾아갔었다. 그 나라의 보통 사람들이 사는 동네를 구경하면서, 작고 사소한 풍경들을 보고 행복해했던 기억이 짙게 남아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마주하면서 평온했던 내 감정의 그래프가 순간적으로 뿅- 하고 튀어 오를 때, 카메라 셔터를 눌러 그 순간을 잡아두는 게 좋다.
#4
그리고 나는 남은 열 개의 밤을 어디서, 어떻게 보낼지 또 한 번 선택의 기로에 놓여야 했다. 파리에서 인천 가는 비행기를 타니까, 파리에서 남은 10일을 여유롭게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이까지 왔는데, 에펠탑은 보고 가야지!라는 생각에 포르투 -> 파리 항공권을 덥석 끊었다. 예전 같았으면 엄청나게 검색해보고, 2-3일 고민 끝에 결정했을 텐데. 스트레스-프리. 하기로 했으니까, 가벼워졌다.
항공권을 예매하고 나서 숙소를 알아보는데, 파리에 대한 마음이 점점 짜게 식어갔다.
1) 포르투보다 숙박비가 훨씬 비쌌고,
2) 에펠탑 근처의 숙소 경쟁은 너무나 치열해 보였고
3) 그래서 너무 관광지 같은 첫인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있으면 내가 별로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끊어놓은 파리 항공권 취소하고, 다른 곳을 알아보던 중에 파리 외곽의 방브라는 마을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에펠뷰 아파트.
에펠탑이냐 vs 꽁냥꽁냥 귀여운 마을이냐.
에펠탑에서 지하철로 무려 40분 걸리는 거리에 있는 곳. 에펠탑과 40분 거리에 있다는 것 빼곤 모든게 다 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아직 약간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에펠뷰, 에펠탑 도보 10분 거리의 고시원 같은 아파트. 에펠탑을 도보로 갈 수 있다는 점 빼곤 별로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고민이 시작됐다.
가벼워지기로 했으니까, 딱 20분만 고민했다.
그리고 나는 전자를 선택했다.
에펠뷰 숙소를 앞에 두고도, 에펠탑과 40분 떨어진 곳에 숙소를 잡는 건 어쩌면 사람들이 잘 하지 않는 바보같은 판단일 수도 있다. 심지어 가격도 비슷한데 말야. 그래서 10박을 결제하고도 약간은 배가 아팠다. 이거 나 잘 한 선택일까?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숙소를 잡았기 때문에, 오히려 이 숙소가 아니었으면 가보지 않았을 공간에 발을 딛게 될 것이야. 그래서 더 그 나라 사람들이 실제로 사는 모습을 조금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정말 살아보는 여행을 할 수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나는 유명한 관광지보단, 사실 조용한 동네를 더 좋아하잖아. 그래서 포르투 숙소도 중심부와 떨어진 곳에 잡았고. 역시 나는 나야!
내가 잡은 숙소가 있는 이 한적한 동네를
내 여행의 중심지라고 생각하면 되는거 아냐?
이 모든 것들은 사실 아직까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고, 내 머릿 속에서 상상으로만 그려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한 달 살이 여행이 끝나면 꼭, 이 글을 다시 꺼내보지 않을까. 준비할 때의 내 마음가짐은 어땠고, 그래서 직접 부딪히고 난 후의 느낌은 어땠는지. 분명 다르겠지. 어떤 다른 모양을 하고 있을지, 너무 궁금하다.
#5
걱정하는 마음을 걷어내고 솔직한 내 마음의 방향을 따르기. 이번 여행 준비의 과정도, 결국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무수한 선택의 상황 앞에서, 오롯이 내 스스로가 내린 결정들에는 어떻게든 나의 모습이 묻어나있기 마련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물음. 그렇게, 이번 여행 준비를 통해서도 조그만 단서를 얻게 되었다.
여행 가서도, 내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을 잘 들여다보고 그 것들을 꼼꼼하게 기록해두면 참 좋을 것 같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내 취향의 조각들을 꾸준히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겠다. 라는 말을 몇 개월 전에 던졌는데. 멈추지 않고, 꾸준하게 잘 찾아나가고 있는 것 같아서 대견하다 태욱이.
그래서 나는 코젤 다크가 내 타입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결국 가장 나다운 정답을 찾을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