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이나 화단이 있는 집 모퉁이에는 상추나 시금치, 파, 마늘, 고추 등이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아 가족들의 식탁을 풍성하게 한다. 옥상 한쪽에 흙을 메워 만든 자그마한 우리 텃밭에도 계절에 따라 상추, 고추, 방울토마토, 부추 등을 심는다. 그 중에서 가장 자주 즐기는 채소는 상추다.겉절이를 하거나 쌈을 싸 먹는다.
어머니께서는 반찬이 없거나 입맛이 없을 때 마당 한편에서 자라고 있는 싱싱한 상추를 한 소쿠리 뜯어 와서 나에게 씻어오라고 하셨다. 우리 집은 수도를 공동으로 사용했다. 식사 준비 때가 되면 옆집에서도 같이 써야 해서 수돗가가 늘 붐비었다. 밥할 쌀을 준비하고 과일과 반찬을 할 채소를 씻느라 늘 북적였다. 씻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상추를 준비하는 것은 서로 간에 불편했다. 대신 집에서 50미터쯤 떨어진 골목 끝에는 친척 집이 있다. 장수 오빠네 집에는 펌프(우리는 작두라 불렀음) 물과 수돗물을 같이 사용하였다.
나는 장수 오빠네 작두 물을 좋아했다. 어머니가 심부름을 시키면 “예”하고 냉큼 대답한다. 동시에 상추 소쿠리를 들고 장수 오빠네로 달려간다. 장수 오빠 어머니인 이모가 웃으며 반겼다. “상추 씻으러 왔구나. 다 컸네.”작두 주변은 네모 반듯하게 시멘트로 덧발라져 있다. 작두에 마중물을 넣어 기다란 손잡이를 거의 안다시피 하고 위아래로 누른다. 갱도의 물을 빼내기 위해 개발했다던 작두는 놀잇감이 없던 시절, 진공상태의 공기압력을 느낄 수 있어 더욱 스릴이 있었다. 한 번은 서로 작두질한다고 가위 바위 보로 순서를 정하기도 했다. 뻑뻑하던 작두질을 널뛰기하듯 한바탕 하다 보면 시원한 물이 콸콸 나오기 시작했다.
한여름의 후텁지근한 날씨는 조금만 움직여도 땀을 찍찍 나게 했다. 숱이 많은 긴 머리로 덮여있던 등은 끈적끈적해지고 얼굴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나는 작두에서 나오는 시원한 물을 받아 상추를 씻으며 더위를 차츰 잊었다. 마치 오래오래 하고 싶은 물놀이와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상추 씻기 요령이 없는 내가 열심히 씻은 상추는 깨끗하지만 누덕누덕 모두 해어진 상태다. 씻을 땐 몰랐는데 집에 돌아올 때는 보인다는 게 신기했다. 혼날까 간이 콩알만 해진 나에게 어머니는 “어서 와라. 울 딸내미, 애썼네. 어서 밥 먹자.” 상추를 받아서 상에 올려놓는다. 밥상엔 멸치조림과 콩나물무침 그리고 단무지무침, 쌈장과 고추, 오이 등이 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쌈을 싸 먹었다. 가끔 곤로에 프라이팬을 놓고 볶은 빨간 고추장 불고기가 올라오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상추가 담긴 그물 모양 소쿠리의 빨간 바닥이 바로 보였다.
상추를 많이 먹은 날은 잠이 잘 온다. 바람 솔솔 부는 마루에서 하나 둘 낮잠을 잔다. 아버지는 금방 코를 드렁드렁 고셨다. 식구들이 한 명씩 자기 시작하면 나도 잠이 왔다.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는 유난히 컸다. 조용한 한 낮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와 식구들의 쌕쌕거리는 소리 외에 다른 소리 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평화로운 한낮이었다.
쫄깃하면서 부드러운 우렁이의 식감은 입맛을 자극한다
입맛이 없을 때 이제 우리 가족은 우렁 쌈밥집에 간다. 신선한 야채와 고기, 다양한 반찬을 즐길 수 있으므로 식구들이 모두 좋아한다. 시금치, 톳, 오이, 고사리, 취, 가지 등 다양한 나물과 두부요리, 제육볶음, 된장국 등이 나온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핵심 멤버인 여러 가지 야채가 나온다. 케일, 신선초, 상추, 배추, 케일, 양상추, 비트, 민들레 등 종류도 다양하다. 빨강, 노랑, 길쭉하고 넓죽한 제각기 색깔과 모양이 다른 야채를 번갈아가며 쌈을 먹는다. 거기에 쌈밥을 위해 특별히 제조한 우렁 쌈장은 맛있다. 쫄깃하면서 부드러운 오동통한 우렁이의 식감은 입맛을 자극한다.
쌈밥을 평범한 밥상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반찬이 있고 다양한 색과 맛의 푸짐한 쌈이 있는 쌈밥은 먹기도 전부터 마음을 풍요롭게 해 준다. 한입 미어터지게 쌈을 집어넣고 얼굴을 바로 보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라도 친구가 되지 않을까. 쌈밥은 누구라도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는 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