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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원석 May 31. 2018

3. 아빠, 나랑 자자

장마철도 아닌데, 종일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누군가가 찾아 올 것만 같고 

누군가가 그리운 날, 비 오는 날.

내 마음은 하루종일 편하지가 않았다. 

누군가가 나를 네모난 벽 속에 가둬 놓은 것 같았다. 

비를 맞으며, 어딘가로 뛰쳐나가고도 싶고, 

또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것도 많았다.

“엄마, 우리 핏자 시켜먹자.”


“핏자는 무슨 핏자냐? 

우리 것을 먹어야지. 엄마가 호박 부침 해 줄게.”

호박 부침은 별로 입맛에 당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먹고 싶은 욕망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달랬는데, 또 슬며시 심통이 났다. 

아니, 엄마는 어쩜 나랑 하나도 통하는 게 없단 말인가? 

요즈음 호박 부침을 먹는 애들이 몇이나 된단 말인가? 


“엄만 내가 뭐 퀘퀘묵은 엄마 친군 줄 알아?”

“그건 또 무슨 소리니? 

네가 네 친구라니? 허허 별 일이로구나.”

“엄마, 요새 얘들, 누가 부침을 먹어요?”

나는 짜증을 내었다.

“요즘 애들일수록 우리의 음식을 먹어야 해. 

우리 음식을 먹어야 우리나라 사람이지. 

어디 우리나라에 살고 우리말만 한다구 

다 우리나라 사람인 줄 아니?”

엄마가 이쯤 말을 꺼냈으면, 

엄마의 마음을 꺾을 수가 없다.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방으로 가서, 

라디오 스위치를 눌렀다. 


우리들 마음엔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예요

산도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에프엠 방송에서 동요가 나오다니, 내 귀를 놀라게 했다. 

나는 볼륨을 잔뜩 올렸다. 

노랫소리가 커지자 내 마음이 

탁 트이는 것 같아 마음이 시원하였다. 

파란마음 하얀마음이 끝나고 잘 모르는 노래가 나왔지만, 

‘파란마음 하얀마음’에 젖어 볼륨을 줄이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방문이 활짝 열리더니, 엄마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넌, 이제 엄마 말이, 말 같지도 않니?” 

엄마가 빽 소리쳤다.

“······”


나는 엄마가 왜 그러는가 싶어 멍하니 엄마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끄럽다고 소리 좀, 줄이라고 했잖아.”

그제서야 엄마가 왜 큰 소리를 쳤는지를 알고 소리를 줄였다.

‘엄마는 왜 또 내게 신경질이지?’

바깥에서 내리는 비가 세차게 내 마음 안으로 쏟아져 내렸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소리 좀 줄이라는 데, 또 눈물이냐? 누굴 닮아 저런지 원···”

엄마는 혀를 끌끌 차며 방에서 나갔다. 

내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정말이지 우리 친 엄마가 아닌가 봐.’

나는 침대 머리에 엎드려 소리 없이 울었다.


저녁나절이 되자 비가 그치고, 

지는 해지만 빛이 반짝 내 방안으로 들어왔다. 

내 마음도 흐리고 비가 오다가 설핏 개였다. 

오늘 따라 아버지도 일찍 퇴근했다. 

아버지가 일찍 집에 오면 제일 신이 나는 건 나였다.

“아빠, 나보고 싶어서 일찍 왔지?”

나는 아버지 팔에 매달려 쫑알대었다.


“비도 오고, 우리 공주님이 보고 싶어 한걸음에 달려왔지?”

아버지는 내가 귀여워 어찌 할 바를 몰라 했다.

“저이는 애 버리게···?”

엄마는 저녁 준비를 하다가 혼자 말을 했다.

“자자, 좀 놔라. 아빠 샤워하고 올께.”

아버지는 팔에 매달린 나를 떼어놓으며 말했다.

“아빠, 내가 아빠 등 밀어 주면 안 돼?”

내 말에, 아버지는 으아 해 했다.

“우리 공주님이 아빠 등을?···”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되물었다.


“푼수야. 여자가 어떻게 남자 등을 밀어 주니?”

오빠가 나서서 나를 나무랐다.

“난 아빠 딸이잖아. 딸이 아빠 등을 밀어 주는데 뭐가 어때?”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도 그렇지? 다 큰애가···.”

“나, 아빠 등 밀어 주고 싶단 말야.”

나는 아버지에게 매달렸다.


“너 엄마 저녁 상 보는 것 좀 도와줄래.”

보다 못한 엄마가 나를 불러들이려 했다.

“엄마, 나 아빠 등 밀어 드려야 된단 말야.”

나는 엄마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쟤가 왜 점점 저러지?”

엄마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 있었다.

“수영아 오늘은 엄마 일 돕고 

다음에 시간 있을 때, 밀어 줄래.”

아버지는 나를 달랬다. 


나는 입술을 쑤욱 내밀고 주방으로 갔다. 

“내키지 않으면 하지 마라. 언짢은 마음으로 음식을 

만지는 건 식구를 위해서도 좋지 않아.”

엄마는 벌써 내 마음을 알고 있었다.

“엄마는? 나 아빠 등 못 밀게 할려구 그러는 거지?”

나는 뾰루뚱 해 하며 물었다.

“아무리 아빠래두 다 큰 여자애가 볼상 사납게 그게 뭐니?”

엄마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누르며 좋게 말했다.

“내가 뭐 다 컸어? 맨 날 어린것이라고 하면서”

“여자는 다달이 있을 게 있으면 다 큰 거야.”

“······”


수영인는 엄마 말에 잠자코 있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다 큰 여자는 안 돼나 뭐? 엄마는 아빠랑 같이 자잖아.”

“그래서?”

엄마는 저윽이 놀랐다.

“그래서 뭐긴 뭐야? 그렇다는 거지.”

나는 다음 말을 하고 싶은 게 있었지만, 

엄마가 눈을 무섭게 떠서 말끝을 흘려버렸다.

“푼수 100단아, 보자보자 하니까 끝이 없구나. 

엄마와 아빠랑은 결혼했잖아. 그러니까 같이 살고 같이 자는 거야?”

민우가 수영이 머리를 쥐어박았다.

“나도 이 담에 어른이 되어 아빠랑 결혼하면 되잖아.”

수영이도 지지 않았다.

“넌, 정신 연령이 유치원생밖에 안 돼. 

이 답답아. 엄마가 있는데, 네가 어떻게 아빠랑 결혼을 하니?”

“어서 저녁을 먹읍시다.”

아버지는 수건으로 머리에 물을 털며 식탁 앞으로 왔다.

“아직도 화가 안 풀린 거야?”


아버지는 뾰루퉁해진 수영이를 보며 말했다.

“아빠, 자꾸 공주, 공주, 그러지 마세요.”

민우가 밥숟갈을 든 체 말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아빠가 자꾸 그러시니까, 

수영이는 진짜로 공주병에 걸렸단 말예요.”

엄마는 잠자코 밥을 먹었다. 그러나 꼭 찝어 말하는 

민우 말이 여간 시원한 게 아니었다.

“여보,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

아버지는 내 화살을 엄마에게 돌렸다. 


엄마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민우를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엄마, 그렇잖아요. 아빠는 회사에 가셔 잘 모르시니까, 

엄마가 말해 보세요. 수영이는 아빠 말만 듣지, 

엄마 말은 잘 안 듣는단 말예요. 

그게 다 아빠가 공주님, 공주님 하기 때문이란 말예요.”

민우는 중학생답게 차근차근 조리 있게 말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

아버지는 잠자코 있는 엄마에게 다시 물었다. 


엄마는 민우 말도 그렇듯 하다고 생각하지만, 

민우 말이 맞는다고 하면 수영이가 상처를 받을 것 같아,

“여자는 이 다음에 시집가면 고생이 많잖니? 

그러니까 시집가기 전에 잘 해 주어야 되는 거야. 

그리고 여자는 약간은 공주병에 걸려있어야 여자 같잖니? 

너도 이담에 커 봐라. 동생 같은 여자를 좋아할 껄.”

오빠 생각 밖으로 엄마는 내 편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나는 엄마 말이 더 고깝게 들렸다. 

엄마는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 마음에 맞는 말을 골라 해서, 

나를 더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 봐라. 민우 넌, 아직 어려서 모른단다. 

수영인 공주병에 걸린 게 아녜요. 또 걸렸다 한들 어떠냐? 

조금은 공주병에 걸린 듯한 게, 여자 매력이 아니겠니?”

아버지는 엄마를 보고 살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아빠, 엄마도 푼수에다가 공주병에 걸렸었어요?”

민우가 못마땅하다는 투로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아버지도 엄마도 민우 말에 깜짝 놀랐다.


“아버지 말씀대로라면, 약간은 푼수 끼가 있고, 

공주병에 걸린 여자가 좋다라는 말씀이잖아요? 

아빠는 그런 여자를 택하셨을 거구요.”

“······”

민우 말에 아버지는 움찔했다. 

엄마 입술에는 파르르 웃음 조각들이 매달렸다.

‘자식 제법 컸는데.’

엄마는 민우가 부쩍 커 보였다. 

그리고 민우가 가깝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엄마는 허전했던 마음 한 구석에 민우가 뿌듯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빠,”

민우는 밥숟갈을 국그릇에 놓으며 아버지를 불렀다.

“왜 그러냐?”

아버지도 숟가락을 놓고 민우를 바라보았다.

“제가 만약에 말예요. 만약에···”


민우는 말을 다 꺼내지 못하고, 빙빙 돌았다.

“뭔지 어서 말해 보렴.”

아버지 말끝에 엄마도 재촉했다.

“그래 말해 봐라.”

엄마는 은근히 민우 다음 말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이 다음에 말이에요. 며느리를 얻으신다면······· 

수영이 같은 며느리를 얻으시겠어요?”

민우 말에 엄마는 물론 아버지도 놀랐다. 

민우가 이런 말을 꺼내리라고는 

미처 생각 못했기 때문이다.


“네 동생이 좋지. 어때서 그러냐?”

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물었다.

“엄마는요?”

아버지 대답이 시원하지 않았는지, 엄마에게 물었다.

“글쎄다.”

아버지와는 달리 엄마는 금방 대답을 않고, 

토를 달고는 말을 이었다.


“엄마는 네가 아직 어려 

며느리 같은 걸 생각하지 않아 잘 모르겠구나.”

엄마는 민우 말대로 수영이 같은 며느리는 얻지 않겠다는 

생각이었으나,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저는요, 아무리 조건이 좋다고 해도, 

수영이 같은 여자를 아내로 삼지 않을 거예요.”

“우리 자식, 이제 다 컸구나. 그런 생각을 다하구.”

아버지는 민우를 대견해 하면서도, 어딘가 못마땅한 눈치였다.

“치이, 오빠만 그래? 나도 오빠 같은 남자랑 안 살 거야.”

수영도 지지 않았다. 


“수영이가 어때서 그러냐구?”

아버지는 씁쓰름한 마음으로 물었다. 

“그건 누구보다도 수영이 자신이 더 잘 알 거예요.”

“그런 선문답이 어디 있니? 얘길 해 봐야 알지? 

그래야 수영이에게 고칠 일이 있으면 고치지.”

아버지는 민우가 말을 돌리자 서운한 눈치였다. 

민우는 민우대로 이참에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고 싶었으나, 웬지 말을 꺼내기가 싫었다.

“여보, 국 다 식어요. 어서 집수세요, 

수영아 너도 어이 먹어라. 오늘 참 좋은 토론이었네요. 

그렇죠, 여보?”

엄마는 서둘러 이야기를 마치려 했다.


“그래. 어서 밥 먹자.”

엄마는 이야기를 마쳤지만, 민우 얘기를 더 듣고 싶은 

충동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올랐다. 

그리고 내 편 네 편을 가르자는 것은 아니지만, 

민우가 엄마 편으로 가까이 다가온다는 것이 흐뭇했다.

가끔 수영이와 마찰이 있을 때, 

민우가 거들어 주는 것이 미덥기도 했지만, 

엄마 앞에서 능청을 떠는 것이리라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런데 오늘 민우는 엄마가 생각하던 그런 민우가 아니었다.


네 식구가 한 식탁 앞에 앉았지만, 

생각은 모두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정말이지 이럴 땐 가족이 아니라, 

남남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되지 않는 말이라도, 아니 말싸움을 해도 

그것이 서로 함께 하는 것이지, 

입을 다물고 함께 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서로 남남이 되어 자기의 갈 길을 

헤매고 있을 때에, 수영이가 식구의 줄을 매어 놓았다. 


“아빠, 오늘 나랑 같이 자자.”

나는 아버지 귀에다 대고 살짝 말했다. 그 소리는 

엄마 귀에도, 민우 귀에도 다 들어오는 소리였다.

민우는 엄마 얼굴을, 엄마는 아버지 얼굴을, 

아버지는 내 얼굴을 서로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랑 같이 자자구?”

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물었다.

“그래. 오빠는 엄마랑 자라고 하구.”

내 대답에 놀란 것은 엄마가 아니라, 민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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