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설 작가,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며칠째 읽고 있는 시집과 필사 노트, 흰 종이와 잘 깍은 연필 한 자루, 나는 차례대로 식탁에 가지런히 놓았다. 무엇이든 한 장을 채워야 잘 수 있다는 주문을 건 사람처럼 흰 종이를 노려봤지만 선뜻 연필을 쥘 수는 없었다. 영산홍이 붉은 물을 올리고 있다고, 등이 굽은 아버지는 떨어지는 벚꽃 잎을 맞으며 일하러 갔다고, 달빛 하나 보이지 않는 깊은 밤에 식수들은 하염없이 잠이 들고, 아직 귀가하지 않은 식솔 하나를 떠올리며 새벽을 맞이하고 있다고, 그 깊은 어둠 속에서 노란 민들레가 대견하게 꽃을 피우며 새벽을 부르고 있다는 것에 대해 쓰고 싶었다. 쓰고 싶지만 써지지 않았다. 연필을 잡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고, 벙어리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누구에게든 털어놓으면 이 갑갑증이 좀 나아질까. 마음처럼 되지 않는 글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의 전공이, 마흔 살이라는 중압감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조카들에게 꼼짝없이 손발이 묶인 나의 현실이, 내가 자처한 족쇄에 엉켜 탈출할 수도 없는 이 집이, 나에게는 육중한 관처럼 느껴졌다. 내 안의 언어를 꺼내지 못한 실패자가 된 나는 필사 노트를 펼쳐 시집의 한 페이지를 한 글자 한 글자 아주 천천히 베껴 써 내려갔다.
- 김이설, <목련빌라> 부분,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작가정신, 2020.
<밀리의 서재>에서 우연히 본 책이다. 2시간 만에 완독 했다. 눈을 뗄 수 없었다.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전자책을 끝까지 읽는 법이 좀처럼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소설이 끝난 후 '작가의 말'에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무기력해서 필사를 시작했다>라는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아파트 게시판에 붙은 광고문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글쓰기가 어려운 분들을 위한 글쓰기 공부방입니다. 함께 하세요.'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배운다면 모를까, 일반인이 왜 글쓰기를 배워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글 쓰는 게 어려운지 물어봤다. 대부분 글 쓰는 것은 어렵고,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놀라웠다.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글쓰기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라고나 할까.
니에게 글쓰기는 밥 먹고, 잠자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어떤 종류의 글이든, 글이라면 술술 써 왔다. 학교에서는 일기, 편지, 독후감을 쓰고, 글짓기 대회에서는 시나 수필을 쓰고, 대학생이 되어 논문을 쓰고, 직장인이 되어서는 기획서, 이메일, 보고서를 썼다. 그리고 작가가 되어 책을 쓰고, 강의를 위한 글을 쓰고, 기고할 원고를 썼다. 쓰고 고치고, 고치고, 고치는 과정이 나에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작가가 되고 나서 사람들에게 자주 들은 말이 있다.
"저는 글쓰기를 정말 못해요. 글 잘 쓰는 사람을 보면 신기하고 부러워요."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다. 아니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글쓰기에 대해 딱히 애로를 느낀 적이 없었으니 공감하지 못했다. 그랬던 내가.
말더듬증에 걸린 것처럼 글더듬이가 되는 순간을 만났다. 대단한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전혀 새로운 주제의 글을 쓰는 것도 아니었는데 글쓰기가 낯설고 불편하고 어려웠다. 한 문장을 시작하기도, 어렵게 시작한 한 문장에 마침표를 찍기도 버거웠다. 무기력해서 글쓰기가 어려웠는지, 글쓰기가 어려워서 무기력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필사를 결심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필사를 통해 글쓰기의 장애를 극복하자, 그런 깊은 의도는 아니었지만 내심 굳어 버린 뇌와 손가락을 어떻게든 풀어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매일 시집을 읽던 나날이 있었다. 내 안의 언어가 전부 소멸해 아무것도 쓸 수 없던 시절. 이대로 소설을 못 쓰게 되리라는 절망에 빠졌던 때였다. 그건 나를 잃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소설 속 인물처럼 무수한 필사의 밤을 보내고서야, 소설이 아니라 시를 만나고서야, 다시 소설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말을 배우는 어린애처럼, 처음 글자를 배우는 아이처럼 더듬더듬 한 마디씩, 한 글자씩 다시 써나갔다. 소설 속 인물이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곤란한 일을 헤쳐나간 것처럼, 때론 미련하게 참았지만 끝내 자신을 위한 선택을 했던 것처럼, 나도 용기를 내어 다시 쓰기 시작했다.
소설을 쓰는 일은 삶과 같아 시간이 흐를수록 여물고 단단해져야 하는데, 아니 사는 일이 소설 쓰는 것을 닮아 시간이 지날수록 성숙하고 견고해야 할 것인데, 일상도 소설도 늘 미진하기만 한 나는 그 시절처럼 매일 시집을 펼쳐 든다. 다시는 언어를 잃지 않기 위해서, 나의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 김이설, <작가의 말> 부분,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작가정신, 2020.
책 전반에 걸쳐 꾹꾹 눌러 새겨진 육아의 고충은 내 속을 다녀간 듯 그려져 있었다. 언제나 가슴 한가운데 콕 박혀 있는 문장, '일상도 일도 늘 미진하기만 한 것 같은 나'이기에 본문의 구석구석은 물론이고 구병모 작가의 서평, 작가의 말까지 문장 하나하나가 다 위로가 되었다. 책을 더 열심히 읽을 동기도, 더듬더듬 글을 쓸 동기도 생겼다.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이겨냈다는 해피엔딩은 메마른 가슴에도 미소를 피워낸다.
피아노 학원에 등록한 지 한 달이 조금 더 되었을 때 6살인딸이 말했다.
"엄마, 피아노가 이제 어려워."
그렇게 재미있다던 피아노가 그새 어렵다니,
"엄마, 이제 피아노 그만 다니고 싶어."
오, 노. 생각보다 그 시기가 빨리 왔다. 애써 무심한 척 대답했다.
어렵다고 느낄 때 성장하는 거야.
지금 이 시기를 잘 보내면
실력이 또 한 계단 오르는 거야.
딸에게 잘 먹히는 대답이었다. 딸을 피아노 학원에 밀어 넣고 돌아서는데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나 자신에게 딱 필요한 대답이었다.
육아노동자가 된 후에는 자기 계발서 > 에세이 > 소설책 순으로 읽었다. 소설책은 한 번 들면 끝까지 읽어하는데 불가능한 현실이니, 몇 장만 슬쩍 읽어도 되는 자기 계발서나 에세이에 손이 더 갔다. 신기하게 글더듬이가 된 후에는 소설책에만 손이 간다.
'김이설 작가는 시집을 읽고 소설을 다시 썼고, 나는 소설책을 읽고 에세이를 잘 썼다.'
라는 해피엔딩을 기대해 봐도 되려나.
나의, 필사의 밤은 오늘도 계속된다.
나의 언어를 잃지 않기 위해,
나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글쓰기 슬럼프를 이겨 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