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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는 것, 느낀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상의 기록, 생각의 낙수 - '뮤지엄 산' 방문기>

by 들꽃연인

I.

나에게 인생 영화 셋을 꼽으라고 한다면, 매트릭스 1편과 글레디에이터 1편, 그리고 Sound of Music 이렇게 세편을 들 수 있겠다. 그중에서도 최고는 탄환의 궤적을 피하는 키아누 리브스의 명연기가 인상적이었던 매트릭스이다.

매트릭스2 Pinterest_pagheramai.jpg [매트릭스 1편에서의 키아누 리브스} (이미지 출처 : Pinterest_pagheramai)

매트릭스를 좋아하는 것은 내가 관심이 많은 ‘정체성’을 다룬 영화의 베스트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래 비교적 많이 나왔던 정체성 영화에는 ‘토탈리콜’, ‘페이스 오프’에서부터 맷 데이먼의 본 시리즈(본 아이덴티티,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 만화영화와 동명의 ‘공각기동대’에 이르기까지 상당 수의 영화를 들 수 있다.


그중에서 ‘페이스 오프’는 주인공과 악당이 성형수술대에서 얼굴이 바뀐다는, 다소 황당한 소재로부터 출발한다. 존 트라블타와 니콜러스 케이지가 주연한 이 영화는 보통 B급 액션영화로 알려져 있지만, 난 이 영화를 정체성 영화의 압권으로 꼽는다.


특히 주인공과 악당이 양면 거울을 사이에 놓고 서로 권총을 겨누는 장면은 정체성에 대한 표현으로는 정말 일품이다. 거울에는 악당의 얼굴을 한 자신이 총을 겨누고 있다. ‘그 총은 누구를 겨누고 있는가?’ ‘거울에 비친 그 모습은 나인가, 상대인가?’ ‘악당은 누구이며, 정의의 사도는 누구인가?’ 그리고 이 질문은 결국, 배우는 물론 관객 자신에게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궁극적인 물음을 던지게 한다.

페이스 오프1 Pinterest_jackomarchetti.jpg {영화 'Face off' 포스터] (이미지 출처 : Pinterest_jackomarchetti)

헐리웃은 흥행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곳이다. 이런 헐리웃에서 이처럼 정체성을 다룬 영화가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물론 사회 정의의 정체성이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II.

제임스 터렐 (James Turrell, 1943년 ~)은 어린 시절부터 빛과 우주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고, 이 주제로 꾸준히 설치 미술을 진행하고 있는 미국의 예술가이다. 그의 작품들은 하늘과 빛을 바라보는 가운데, 명상과 사색의 시간을 갖게 한다.


원주에 있는 ‘뮤지엄 산’에는 이 제임스 터렐의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 예술품들은 ‘본다’라는 말보다는 ‘체험한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제임스 터렐관에 들어서면 처음 만나게 되는 스카이스페이스(Skyspace)는 하늘을 향한 열린 창이다. 내가 늘 보던 하늘이지만, 그 하늘 자체가 너무 예쁜 예술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타원형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바닥을 보며 움직이면, 바닥에 비친 하늘이 마치 나를 따라다니는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 그림에서 나체 여인의 시선이 나를 따라다니는듯한 느낌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전시실에서 조금 움직이다 보면 타원형의 하늘 모습이 완전히 동그란 원으로 보인다. 내가 보는 것의 정체에 대해 의문이 들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이 전시실은 비가 올 때는 하늘 창을 닫고 스페이스 디비전(Space- Division)이라는 다른 작품으로 바뀐다고 한다.

스카이스페이스.jpg [Skyspace : 가운데 푸른 타원형은 진짜 하늘이다.] (이미지 출처 : '뮤지엄 산' 홈페이지)


그다음 간츠펠트(Ganzfeld)라는 작품을 만나게 되는데, 간츠펠트는 독일어로 ‘완전한 영역’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정면에 있는 스크린은 시시각각으로 색이 변하면서 다른 느낌을 주는데, 설명하던 직원이 갑자기 그 스크린 안으로 들어가면서 2차원이 3차원으로 변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관람자 모두 그 스크린 안에 있는 또 다른 룸으로 들어가 보게 되는데, 그곳에서도 이곳이 끝이 있는 곳인가 하는 다소 환각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Ganzfeld 완전한 영역.jpg [Ganzfeld] (이미지 출처 : '뮤지엄 산' 홈페이지)


그다음 만나게 되는 작품은 호라이즌 룸(Horizon Room)이다. 계단의 끝에 사각형의 빛 도형이 있는데, 평면으로만 보였던 도형에, 사람이 들어가면서 없어져버리는 다소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호라이즌 룸.jpg [호라이즌 룸(Horizon Room)] (이미지 출처 : '뮤지엄 산' 홈페이지)

관람자들이 모두 그 룸 밖으로 공간이동(?)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곳에는 오크밸리 골프장의 시원한 전망이 열려있어 순식간에 다른 세상에 온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오크밸리.jpg [호라이즌 룸에서 나왔을 때 보이는 오크밸리 골프장의 모습] (이미지 출처 : 직접 촬영)


어두운 통로를 지나 만나게 되는 다음 작품은 웨지워크라는 작품이데, 처음 전시실에 들어갈 때는 눈이 어두움에 적응을 못해 벽 쪽에 붙어있는 안전봉을 잡고서 더듬더듬 걸어가게 된다. 마치 시각장애인 체험을 하는 것 같다. 작품은 직사각형의 빛 안에 쐐기 모양의 도형이 보이는데, 내가 있는 위치가 달라지면 도형의 모양도 달리 보인다. 빛의 환영이 만들어낸 모호한 경계는 과연 본다는 것은 무엇이고, 느낀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Wedgework.jpg [웨지워크] (이미지 출처 : '뮤지엄 산' 홈페이지]


40여분의 제임스 터렐관 체험을 마치고 나면, 명상을 하고 나온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또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의 실체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 맞나?’.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각은 정말 실체가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매트릭스의 가장 유명한 장면, 주인공이 빨간 약을 먹을까, 파란 약을 먹을까, 고민하는 장면에서 내가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실체가, 사실은 완전한 허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뮤지엄 산’과 특히 제임스 터렐관을 경험하지 않으신 분께는 감히 방문과 체험을 추천드린다.

매트릭스_pinterest_akascheeva12110135.jpg [영화 매트릭스 1편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빨간 약과 파란 약을 제시하는 모습] (이미지 출처 : pinterest_akascheeva12110135)


III.

제임스 터렐관을 제외하더라도 ‘뮤지엄 산’은 꼭 방문해봐야 할 정도로 좋은 곳이다. 주차장부터 시작해서 기념품 샵까지 모든 곳이 인스타 성지라고 할만하다. 유현준 건축가는 광주 아시아 문화의 전당, 아모레 퍼시픽 사옥과 함께 ‘뮤지엄 산’을 한국의 최고 건축물 베스트 3으로 꼽기도 했다.


일본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이곳은 이동을 하면서 다음 장면이 안 보이도록 벽을 멋지게 설치했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은 콘크리트 건축 면을 그대로 드러낸 곳이 많은데, 이와 함께 돌을 쌓아 디자인한 부분도 많다. 이곳 건축에 사용된 돌은 모두 경기도 파주시의 돌을 가져온 ‘파주석’이라고 한다.

콘크리트와 파주석.jpg ['뮤지엄 산' 본관 복도. 노출 콘크리트와 파주석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미지 출처 : 직접 촬영)

입구의 워터가든을 비롯해 카페 등 곳곳에 물을 배치해 안정감과 함께 거울의 효과를 주고 있다. 거울 효과를 위해 물은 흐르지 않게 했는데, 이를 위해 관리에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내가 방문한 날에도 여러 분들이 물에 빠진 낙엽을 치우기 위해 애쓰고 계셨다.

카페 워터가든.jpg [카페를 감싸고 있는 워터가든 중 일부] (이미지 출처 : 직접 촬영)

워터가든을 주위에 거느리고 있는 카페도 참 안정감 있고 좋은 곳이었다. 바로 옆에는 물이 있고, 탁 트인 시야로 멀리 있는 수려한 산들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는 일품이었다. 단, 커피와 케이크류 가격은 만만하지 않았다. 나는 오전 10시에 입장해 오후 4시 반에 나왔는데, 이곳에는 별도의 음식점이 없어 요기를 하려면 카페를 이용해야 한다. 샌드위치와 케이크 등이 있었다.


뮤지엄과 야외 전시장 등에서는 스위스 현대미술가 우고 론디노네의 개인전 <Burn to Shine>이 열리고 있었다. 철학이 느껴지는 작품들이었지만, 보는 것 자체가 멋진 전시였다.

시계 창문 사랑은 우리를 만든다 우고 론디노네.jpg [우고 론디노네의 설치 작품 : 시계, 창문, 사랑은 우리를 만든다] (이미지 출처 : '뮤지엄 산' 홈페이지]

명상관에서는 싱잉 보울(Singing bowl) 명상을 체험할 수 있었다. 싱잉 보울이 울리는 음파가 몸의 세포들과 교감하며 반응을 이끌어낸다고 하는데, 이런저런 스트레스와 걱정을 털어낼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정치 분쟁과 사건 사고가 가득 찬 신문, 어쩔 수 없이 주문하고 쌓이는 택배 상자들, 내야 할 청구서 같은 이런저런 나의 현실들을 오랜만에 저편 멀리로 보내고 '뮤지엄 산'에서 보는 가을 하늘은 더없이 푸르렀다.

산 단풍.jpg [단풍이 절정이었던 '뮤지엄 산'] (이미지 출처 :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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