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생 시절 딱히 하고 싶은 것은 없었고,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점수에 맞추어 집에서 가까운 대학 회계학과에 원서를 넣었다가 운 좋게 합격이 됐다. 전공에 관심은 별로 없었고, 4년 내내 아르바이트, 동아리, 학생회 활동을 하느라 바빴다. IMF라는 한파 때문에 큰 기대감 없이 작은 무역회사에 취업을 했다. 6개월 다니다가 가족들 몰래 그만두고 대학원 시험을 봤다.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스물일곱 팔월에 졸업을 했으나, 막상 취업이 쉽지 않았다. 스물 열덟에 겨우 신입사원이 되었는데, 5년 사귄 남자친구가 강하게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혼자 살 것은 아니니까, 이만 하면 되겠지~’하고 그해 5월 결혼을 했다. 한 삼년은 신혼생활도 즐기고, 사회생활도 적응 하리라 계획했다. 그런데 일년이 채 안되어서 임신을 했다. 스물 아홉에 큰 아이를 낳고, 사년 터울로 둘째를 낳았다. 그때까지 내 주변에는 결혼 안하고, 자기 삶을 즐기는 친구들이 많았다.
삼십대 초반에 두 딸의 엄마가 되었다. 직장에서도 제일 바쁘고 힘든 시기였다. 남편은 자영업이라 퇴근도 주말도 없는 사람이었다. 연로하신 두 어머니께 죄송해서 둘째 아이 낳고 6개월이라도 키워놓고 출근하고 싶었다. 평소 직장여성에게 육아휴직은 꼭 필요한 제도라고 강조하던 직장에 3개월 육아휴직 요청을 했다. 내가 맡아야 하는 역할 때문에 정 그리하고 싶다면 신규 직원 채용공고를 내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잘못하면 경력 단절이 될 수도 있으니 지금 이 시기 잘 참으라고 나를 위로하는 척했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모습에 실망이 몰려왔다. 스무살 이후로 정신없이 살아왔는데 내친 김에 쉬어 갈까? 결혼해서 아이만 키우던 두 언니한테 얘기했다. 쿠사리만 왕창 먹었다. ‘막내야. 여자한테 경제력이 없으면 남편한테 무시당한다!’, ‘니가 여태 고생했는데, 아깝지도 않니?’ 순간 연봉으로 나의 가사 노동을 당연시 하던 남편 모습이 떠올랐다. 나의 현실을 너무 감상적으로 생각한 것 같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양가 어머니께 도움을 구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를 맡아주는 어린이집이 고마웠다. 직장과 집을 왔다갔다 하는 쳇바퀴 도는 생활을 했다. 가끔 친구들을 만나면 새삼 다르게 사는 모습이 부러웠다. 나도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는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나에게 온전히 주어지는 자유시간이라고는 출퇴근길 지하철에서의 30분 남짓이었다. 그 시간에 책도 읽고 영어공부도 했다. 누릴 수 있는 것보다,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았다. 어서 빨리 삼십대가 끝나고 사십이 되기를 바랬다.
영원히 그 시간이 지속될 것 같더니 그래도 시간은 흘러갔다. 남들 따라 집을 샀다가 빚을 옴팡지게 지고 은행에 돈 벌어주다 보니 직장 그만두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나마 익숙한 곳이 낫겠다 싶어 이직은 생각하지 않았다. 다행히 내가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았다. 막연히 마흔이 되면 직장을 그만두고 여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희망을 품으며 하루 하루 버텼다. 그러다보니 나도 사십대가 되는 날이 왔다. 아이들은 어느새 초등학교에 모두 입학을 했다. 어느 날 우연히 나도 육아휴직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만 8세까지 육아휴직이 가능하도록 노동법이 바뀌었단다. 둘째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세상이 많이 변해 있었다. 직장을 때려 쳐야지만 자유를 얻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승진을 포기하며 어렵사리 6개월이라는 육아휴직을 얻었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항상 부족함을 느꼈다.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에게,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로서 따라다니는 감정이었다. 큰 아이는 엄마도 다른 엄마들이랑 차를 마시고 밥도 먹으란다. 자기도 친구들처럼 엄마 따라 친구들이랑 놀러 가고 싶단다. 나도 동네 엄마들을 사귀고 싶었다. 학기초 반모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참가했다. 하지만 내가 낼 수 있는 시간과 다른 엄마들이 낼 수 있는 시간은 달랐다. 만나도 서로의 관심사가 달랐고 그래서 그 시간이 즐겁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동분서주했던 이십대를 보내자마자 부모가 되어야 했고, 직장에서 내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고군부투하며 삼십대를 지냈다. 이제 조금 더 여유롭게 살고 싶었다. 두 아이가 자신에게 솔직하고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으로 커주었으면 했다. 육아휴직 6개월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좋을까 고민했다. 먹고 살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가족 간에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우리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이들이 더 크기 전에 단순한 삶을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러면서 미국의 공동체 방문 계획을 세웠다. ‘가족이 함께 하는 생활, 집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곳, 자연을 느끼며 살 수 있는 삶, 자신이 가진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곳...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행기 값만 있으면 몇 달 생활할 수 있는 곳!’
아직도 육아휴직이라는 단어를 못 쓰는 직장도 있지만, 그래도 세상이 달라졌다. 요즘 세대에게 육아휴직은 여성근로자들의 당연한 권리가 되는 듯하다. 그 육아휴직을 이런 식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공유하고 싶다. “엄마~ 나 아기 때 육아휴직 안 쓰기를 잘했죠? 그래서 우리가 지금 미국에 와 있잖아” 둘째 아이가 한 말이다. 두 딸과 함께 한 107일의 여정을 어떻게 준비했고, 어떠한 경험을 했는지 그 일상기록을 나누고 싶다.
직장맘의 육아휴직 레시피 – 두 아이와 미국 세 달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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