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이라 평소보다 아침식사를 2시간 늦게 8시에 한단다. 오랜만에 나도, 아이들도 늦잠을 자본다.
제인할머니가 우리의 첫 일정을 알려주신다.
“Ray~ 오늘 아침 식사는 아더씨가 초대를 했어요. 잘 다녀와요.”
아더씨는 7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 두 명은 영국에 가 있다. 지난 일요일 세례식을 했던 여자 청년이 아더씨의 딸이다. 우리를 위해 밥, 꽁치캔, 햄까지 준비해 주셨다. 평소에 먹던 아침식사 치고는 성대하다. 준비한 정성을 느끼며, 우리 가족에 대해 소개하고 이야기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9시가 넘어서 전체 모임이 열렸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말씀을 나누고 찬송, 기도로 시작한다. 오늘은 젊은 가족이 모임을 주도하더니 갑자기 판토마임을 하기 시작한다. 아빠가 말을 하고, 5살 정도 되는 남자아이가 행동을 한다. 5살 아이가 장난감 손수레를 중앙으로 가지고 나와 농장에서 곡식 심는 흉내를 낸다. 그리고 당근을 심었는데도 싹이 나오지 않았나보다. 차례 차례 여러 사람들이 등장해서 “싹이 나오지 않을 거야~~~”라고 한다. 아이는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씨앗을 보살핀다. 그리고... 드디어 싹이 나와 당근이 자라기 시작한다. 그 순간에 모두들 박수를 친다. 따뜻한 날씨와 바람에 농장의 야채들이 쑥쑥 자라날 것을 생각하게 된다. 작은 것 하나하나에 300여 명의 공동체 식구들이 함께 기쁨을 나눈다.
이어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10대 시절을 보낸 아흔두 살 요한 할아버지의 증언을 듣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먼저 강당에서 폴란드 포로수용소에 대한 짧은 영상을 함께 보았다. 그리고 다시 잔디밭으로 나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다. 최근에 책도 쓰셨다니, 연세에 비해 에너지가 넘치신다. 자신의 성장과정, 포로수용소에서 만난 사람들, 거기에서 영어를 배운 과정, 이름에 대한 이야기까지 진지한 대화가 이어진다. 부르더호프에는 독일에서, 영국에서, 파라과이에서 공동체에 참여한 가족들이 많다. 공동체의 조상은 결국 유대인이거나 독일인이거나 영국인일 것이다. 자신들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기에 왠지 모르게 더 경건하고 집중하는 느낌이다.
오전 11시가 넘으니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바람이 불어온다. 폭풍이 올 것이라고 한다. 아이들은 거실에서 레고를 조립하고, 나는 책을 읽고 있다. 어제부터 ‘바닥난 영혼’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에서는 읽어버린 평화를 찾아가는 16가지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순간 내가 찾고 있는 ‘평화’는 무엇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식탁에 앉아서 편지를 쓰시는 조할아버지께 질문을 해본다.
“조할아버지~ 마음의 평화가 언제 많이 느껴지나요?” “음... 대부분의 생활에서 느껴요. 제인과 대화를 할 때~ 생활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과 마음이 안 맞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대화로 풀어요. “나는 지금 하고 있는 농장 일을 아주 좋아해요. 내가 선택한 일은 아니지만, 그 일을 하면 행복해요~ 물론 계획하기를 좋아하는 아내와 가끔 갈등도 있지만요. 생활하면서 항상 즐거워요.” “이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 안에서 나는 평화를 만나요.” 여기에서 조할아버지와 제인할머니의 성격 차이를 다시 느낀다. 두 분의 성격이 많이 다르다. 제인할머니는 정말 계획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 호스트 패밀리도 하시는 거겠지?
오트밀 쿠키를 만드시던 제인할머니도 한 말씀하신다. “우리는 너무 많은 일을 하지 않아요. 너무 바쁘면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르거든요.” “이곳에서는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요. Ray가 남편 없이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온 것은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어요. 공동체 밖에서는 서로의 의견 차이, 다른 생활 방식 때문에 이혼을 하잖아요. 우리는 부부가 항상 함께 하려고 하고, 서로 나누려고 하고 있어요.”
정말이지 여기에서 가족을 떼어놓고 할 일은 전혀 없다. 40년을 함께 살아온 조&제인 부부는 매 식사 때마다, 매 순간마다 서로를 찾고 기다린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서로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혹시라도 자신의 일정을 알리지 못하고 어딘가로 가야 한다면 꼭 메모를 해 놓는다. 루크가 남편도 같이 오라고 했던 것이 100% 이해된다.
오후에는 조&제인의 손주들까지 들판으로 산책을 나갔다. 야채밭을 지나고 농장을 지나 한참을 걸었다. 곧 비가 쏟아질 듯 잔뜩 흐리고 바람이 부는 날씨인데도 모두 즐겁다. 아이들은 길가에 숨어있는 산딸기를 찾느라 야단이다. 그렇게 한참을 걸으니 개울 옆에 아이들이 놀 수 있도록 캠핑장으로 꾸며 놓은 ‘Big Mari’에 도착했다. 지민이가 자랑스럽게 얘기해준다. “엄마, 나는 학교에서 선생님들이랑 거의 매일 여기에 와서 야채도 심고, 놀았어요. 불을 피워서 햄버거도 만들어 먹었어요.” 4명의 아이들은 금세 신이 나서 풀과 물, 흙들을 가지고 음식을 만들어서 연신 할머니 입에, 엄마 입에 넣어주느라 바쁘다.
오늘은 부루더호프에서 보내는 두 번째 일요일이면서도 마지막 일요일이기도 하다. 닭볶음, 김밥을 준비한다. 둘째 아들네 가족, 엘리, 미샤가 초대되어 함께 식사를 하였다. 혹시 몰라서 챙겨 온 참이슬 한 팩을 함께 나누었더니 반응이 좋다. 후식으로는 아이스크림과 사과파이, 차를 마셨다.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더 먹겠다고 야단이다. 잠자러 갈 아이들을 위해 설거지를 미루고 온 가족이 참여하는 게임을 시작한다.
첫 번째는 열쇠 찾기 게임이다. 술래가 열쇠를 숨기는 동안 나머지는 밖에 나가 있어야 한다. 그 후 나머지가 들어와서뒷짐을 지고 눈으로만 열쇠를 찾는다. 혹시라도 열쇠가 보이면, 주문을 외워야 한다. “아바사바아바차바~~” 후에 자리에 앉아야 한다. 아이들이 서로 열쇠를 숨기겠다고 난리이다. 욕심쟁이 지민이가 두 번 하겠다고 해서 말리느라 혼났다. 아쉬워하는 아이들을 위해 조할아버지가 또 다른 게임 1개를 제안해 주셨다. 두 번째는 따라 하기 게임인데, 게스트 한 명이 밖에 나가 있는 동안 동작을 진행할 사람 한 명을 정한다. 그리고 동작을 시작하고 게스트가 들어와서 누가 동작을 주도하는지 맞추는 것이다. 게임에 너무 몰입하는 아이들~ 아쉬워하는 아이들을 자제시키며 찬송으로 겨우 마무리를 했다.
아이들이 있어서 아이가 있는 가정을 방문할 기회를 얻게 되고, 이렇게 가족중심적인 문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 이 순간을 충분히 즐기는 것이 지금 나에게 필요한 ‘평화’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