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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 Nov 13. 2019

신비주의 코스프레 이젠 안녕!

 미국 세 달 살기 D-1

  내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한 마디 씩 한다.  

“이 시점에 육아휴직을 결심한 것쉽지 않은 일이야”,

“혼자서 아이 둘을 데리고 미국에 나갈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해”

“갈 곳이 정해지지 않았는데도 비행기 표를 끊은 것이 대단해”

“아이들 못 먹으면 다 엄마 몫인데, 먹을 것 하나 안 챙기고 있는 게 대단해”

그런 말을 듣고 힘들다고 징징 댈 수도 없다.

'대단하다구여?’

아무리 다른 이들이 그런 말을 해주어도..  그 말을 편하게 듣지 못하는 나를 본다.


  매일 정신이 너무 없다. 나는 평소 해외여행을 갈 때 떠나기 전날 짐을 주로 싸는 성격이다. 한국 음식은 준해 가지 않는다. 기껏해야 컵라면, 소주 정도 챙긴다. 그런데 혼자서 두 딸을 데리고 간다니 주변에서 이것저것 해주는 조언이 많다. 덕분에 슬그머니 걱정거리들이 찾아온다. 제때 밥을 못 먹으면 화가 나는 민서를 생각하니 걱정도 된다. 요즘 들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다. ‘내가 왜 이런 거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원인은 결국 2개월간 생활할 곳이 정해지지 않은 데에서 오는 불안이다.


  그런 나를 바라보면서 격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되돌아본다. 대학교 1학년 오리엔테이션을 시작으로 해서 지금까지 MBTI 검사를 4번 했다. 그런데 두 번은 ESTP가 나왔고, 두 번은 ISTJ가 나왔다. 가운데 ST성향은 변지 않으나, 상황에 따라서 양 끝 성향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평소 언제 더 안정감을 느끼는지 곰곰이 관찰해 보니...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한국인의 전형적인 성향 ISTJ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무엇인가 계획이 세워져야 하고 정해진 대로 하는 것에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


  한편으로는 내 ‘E, P성향은 어디 간 거야?’ ‘어쩌면 살기 힘든 세상~ 살아남기 위한 선택일 수도 있어’ 나에 대한 연민이 슬그머니 올라오기도 한다.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권리보다는 의무가 더 많은 때를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나도 때로는 느끼는 대로 행동하고, 변화에 열려 있는 사람이라구!’

‘내 안에 피(Perception) 있어!’를 외쳐본다.

반복되는 거절 속에서 이제는 화도 별로 안 나고, 마음이 아프지도 않다.

‘나의 P가 제대로 발휘되고 있는 거야?’


  출발 3일 남겨놓은 금요일이다. 바쁜 와중이지만, 선생님의 부탁으로 6학년 민서네 반 일일 명예교사를 하러 가는 날이다. 처음으로 이런 역할을 맡아본다. ‘우리 딸 기 살려줄 수 있는 일이라면 해야지~’ 몇 일만에 예쁘게 화장하고 옷도 갖추어 입고 수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얼핏 보니 이메일이 하나 와 있다.

“안녕하세요. 저는 크리스틴이라고 해요. 캠프힐 북미지역 총괄 코디네이터인 나단에게 당신 소개를 받았어요. 혹시 지금 일정이 확정되었는지, 아직도 찾고 있는지가 궁금하네요.”

'오 마이 갓!!'

아주 짧고 장황하지도 않은 글이다. Community Homestead라는 곳이란다. 홈페이지 검색을 해서 바로 들어가 보았더니 위스콘신에 있는 장애인 공동체이다.


  메일 내용에서 ‘exploring’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지만, 큰 기대 걸지 않고 이력서를 첨부해서 답장을 보냈다. 일일 명예교사를 하고, 은행에 가서 환전을 하고, 은사님 스승의 날 행사에 참여하고... 정말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오니 저녁 11시가 넘었다. 다시 이메일을 확인했다.

“당신이랑 스카이프로 통화를 하고 싶어요. 내일 오전 11시에 통화가 가능할까요?”

너무 놀랐다. 마음을 안정시키며 남편이랑 스카이프 설치를 하느라 2시가 넘어 잠을 청했다.


  온몸이 긴장했는지 자는 둥 마는 둥 아침 6시가 되어 눈이 떠졌다. ‘통화하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체력을 지키려면 잠을 좀 자야 하는데...’ 1시간 동안 뒤척이다 책을 펼쳐 들었다. 조금 있으니 먼 길 떠나는 며느리를 위해 수산시장에서 싱싱한 재료를 사와 해물탕을 이는 시어머니의 부산한 움직임이 들린다. 어머니를 도와 아침 준비를 하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데 입맛이 하나도 없다. ‘무슨 맛인지... 언제 11시가 되려나? 시간이 왜 이리 안 가!’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온 몸에 통증이 느껴진다. 기다리는 시간이 나에겐 고통이다.  


  드디어 11시가 되었다. 크리스틴은 50대 정도 되는 여성이다.

 “우리 공동체는 시골에 있고 매우 바쁜 일상 속에서 생활하고 있어요. 공동체에는 장애인들이 사는 6개의 집이 있고, 각 집에는 장애인 3명과 비장애인 3명이 함께 거주하고 있답니다. 당신이 갈 곳에는 2명의 경증 장애인과 1명의 도움이 조금 많이 필요한 여성장애인이 있어요. 주로 할 일은 확인하고, 챙기고, 도와주는 일이고요. 2명의 젊은 비장애인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어요. 당신들은 그 집에서 같이 생활은 하지만, 정원에 있는 작은 오두막에서 잠을 잘 거예요. 돈은 거의 필요 없어요. 공동체에서 맛있는 음식을 제공해요. 여기에 한국인이 한 번도 온 적이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궁금해해요.”


  30여분의 대화를 끝내고 내일 다시 최종 통화를 하기로 했다. 공동체에 내 얘기를 하고 동의를 받는 과정이 남았단다. 일요일 아침에도 6시가 되니 눈이 떠진다. 김치를 볶고 아침 준비를 해 놓고 미리 여유 있게 책상에 앉았다.

“공동체 식구들이 Yes라고 대답했어요. 나머지 정보는 이메일로 안내할게요. 그런데 당신이 런 작은 마을에서 지낼 수 있겠는지 모두들 걱정을 하더라구요”

“물론이죠~!! 도시에 있을 거라면, 한국 집에 있는 것이 나을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미국으로 출발하기 딱 하루 전에 일어난 일이다. 지난 몇 달간 장황하게 나에 대해 소개하고, 신청서를 보낸 곳이 많았다. 엄청나게 공을 들인 곳에서는 연락도 없더니 불과 이틀 만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연락이 왔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인간의 능력밖에 있는 힘이 도우셨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 이제 더 이상 신비주의 코스프레 안 해도 되는 거지?’


직장맘의 육아휴직 레시피 – 두 아이와 미국 세 달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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