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게 까지 짐을 쌌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오후 5시라 여유 있게 생각했는데 오전 내내 정신이 하나도 없다. 건강검진서, 범죄경력 조회서를 가져오라고 해서 출력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써 버렸다. 출발 준비가 은근 오래 걸렸다. 여행사를 통해 자리 지정이 되었다는 말에 안심하기도 했다. 어쩌다가 항공사 카운터에 4시 10분에 도착했다.
“아니~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다행히 비행기 출발시간이 5시 15분에서 6시 20분으로 지연되었으니 망정이지~ 1시간 이내로 오시면 비행기 못 타세요!”
그 말에 너무 놀라 가슴이 조마조마한데... 항공사 직원이 발권을 시작한다.
“비자는 있나요?”
“아니요. 전자여권인데요.”
“네. 그러면 ESTA 승인받으셨어요?”
“네? ESTA요? 여행사에서 다 처리해 줬는데요.”
“.........”
예전에도 미국에 간 적이 있었고, 여행사에서 항공권을 결재했기 때문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여행사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ESTA 이야기를 했더니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저희는 그것까지 확인하지 못해요. 고객님께서 안 받으셨어요? 저희가 신청하면 직접 신청하시는 것보다 더 비싼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런 말씀 안 하셨잖아요. 한시가 급한데 그 말이 지금 하고 싶으세요? 지금 출발해야 한다고요! 어서 해주세요.”
모두 초조한 마음으로 항공사 카운터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
잠시 후 항공사 직원이 부른다. 뭐가 잘못됐나 보다.
“3명만 승인이 떨어졌는데요? 왜 그러죠?”
그 말에 두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엄마, 민서” 두 명 이름을 부르니 옆에 있던 지민이의 동공이 확장된다.
조금 있다가 “지민”하니까, “휴~”하며 정말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는다. ‘아~ 남편이? 이상하다.’
여행사에 다시 전화를 해서 물었다.
“저희도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요? 잠시만요. 이거 전자여권이 아니잖아요. 종이여권이면 비자를 받으셔야 하는데요?”
“설마요. 저희 4월 달에도 사이판에 다녀왔는데요. 거긴 미국령이잖아요. 다시 한번만 확인해 주세요~”
아무리 확인을 해 보았지만, ESTA는 보이지 않았다.
항공사 직원은 공항 내에 당일 전자여권 발행하는 곳이 있다고 확인해 보라는 말만 해준다.
남편이 황급히 공항 지하부터 2층까지 뛰어다녔지만, 그런 곳은 없다는 대답을 듣고 힘이 빠져서 돌아왔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탑승 수속 취소할까요?”
“아니에요....... 가야 해요. 3명이라도... 진행할게요. 네~~~ 그래야 해요!!”
출발 시간이 가까워져 가니 불안함이 커진다. 공항 한 복판에서 모든 짐들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일주일만 동행할 남편의 짐까지 모두 함께 뒤섞여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본다. 완전 난민촌 분위기이다. 물가가 비싼 뉴욕 에어비앤비 4일을 위해, 배고프기로 유명한 브루더호프 생활을 위해, 페루 배낭여행을 위해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했더니... 라면, 햇반, 밑반찬, 과자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짐 정리에 여념이 없는데 항공사 직원이 “빨리 입국하셔야 해요~”하니 가슴이 요동친다. 화들짝 놀라 부리나케 남편과 작별 인사를 하고 출국장에 들어섰다. 정리도 안 된 가방들을 메고, 양 손에 들고 정신없다. 출국장 밖에 혼자 남겨진 아빠를 보고 민서가 눈물을 흘린다.
그래도 갑자기 늘어난 짐 보따리, 여권을 챙기고... 서로를 챙기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아이들이 위기상황에 잘 대처한다.
“그래도 아빠여서 다행이야. 우리가 안 가게 되었으면 어쩔 뻔했겠어요?” 지민이가 이야기한다.
사람의 보호 본능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싶다.
‘그럼~ 못 갔지~ 머~~ 오늘... 어떻게 한 명을 두고 가겠니?’ 지민이 말에 어이가 없어 혼자 속으로만 중얼거려 본다.
정신없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비행기를 탄 것 같다. 늦게 수속 처리를 해서 뒤 꼬리 쪽 자리로 배정되었다. 출발한 지 30분밖에 안 지났는데, 갑자기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린다. ‘이러다 사고 나는 거 아니야?’ 불안한 마음이 심해지고 자꾸 부정적인 생각이 몰려온다. ‘내가 괜한 일을 벌여서... 혹시나 사고라도 나면...'
곤히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곰곰이 오늘의 상황을 되돌아보니 ‘이렇게 비행기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적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가라앉는다.
'출발시간이 연착되지 않았으면 ESTA를 받을 시간이 없어서 이렇게 비행기를 탈 수 없었을지도 몰라~ 그래~
정신 바짝 차려야지~’
12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동안 민서는 식사를 주문하고 영화도 보며 시간을 보낸다. 첫째라서 그런지 민서가 듬직하다. 긴장해 있는 엄마를 잘 챙겨주고 동생이 심심하지 않게 이것저것 알려주다가 잠이 들었다. 뉴욕에 도착하면 어떻게 움직여야 하나 책자를 읽고 있으니 민서가 눈을 뜬다.
“민서야 고마워~”하고 뽀뽀를 해주었다.
“엄마~ 난 엄마 잘 만난 것 같아!”
“왜 그렇게 생각했어?”
“응. 친구 엄마는 애교가 없는데 우리 엄마는 많잖아.”
“그래? 사실... 엄마는 직장에서는 애교가 없어. 빨리 일 끝내고 우리 공주들 챙기러 퇴근해야 해서~ 책상에 앉으면 일만 해. 어떤 때는 점심시간에도 일해~”
엄마를 애교 있는 사람으로 이야기하는 민서 앞에서 마음이 뜨끔해진다. 해야 할 일은 많고 시간은 없어 경직되어 있는 내 표정이 떠오른다.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앞으로는 사무실에서 좀 더 여유로운 마음 가져야겠다, 직원들한테도 애교를 부려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목적지인 뉴욕까지 가기 위해 달라스 공항에서 환승을 해야 했다. 비행기가 1시간 지연되어 환승시간이 너무 짧으니 빨리 서둘러야 했다. 핸드캐리 한 짐들이 많아서 정신이 없지만, 긴급 딱지가 붙은 티켓을 들고 뛰다시피 입국심사대에 도착했다. 아이 둘을 데리고 혼자서 입국하는 한국인 아줌마를 거부할까 봐 가슴이 콩당콩당 뛴다.
“비행기 표 좀 보여줄래요?”
서울에서부터 뉴욕, 페루, 멕시코 항공권까지 출력된 종이를 보여주니 입국심사관이 깜짝 놀란다.
“당신 매우 바쁘겠는데요~”라고 미소를 짓고 통과시켜준다. 심사관이 나와 같은 아줌마라서 내 처지를 이해하는 것 같았다.
달라스에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해서 안전벨트를 매니 마음이 조금 놓인다. 민서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카메라를 넣은 가방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이상하다. 남편 짐에 딸려갔나? 아까 카메라 작동법 익히려고 꺼내놨는데? 아차.. 달라스 공항에 내릴 때 두고 왔나 보다. 울고불고 난리 쳐서 금요일 날 직접 찾아온 물건인데...’ 순간 나에 대한 실망감이 밀려온다.
뉴욕 숙소에 도착해서 아이들을 재우고 남편에게 잘 도착했다고 연락을 했다.
“공항에서 집에 오는 길에 앞 집 아저씨한테 걸려서 저녁 얻어먹고 왔어. 급한 일 때문에 출발 못했다고 뻥쳤어. 1주일간 집에서 일하려고... 사무실에 미국 간다고 이야기하고 다 인사하고 나왔는데~ 창피해서 못 나가겠어. 참! 당신 블로그에 오늘 이야기 쓰지 마!! 알았지?”
카메라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물건을 읽어버리거나, 고장 내거나, 흠집 내는 것을 싫어하는 남편인데... 어떻게든 내 선에서 해결해 보리라!!’
항공사에 분실물을 확인해 달라는 이메일을 보내고 나니 공허함이 찾아온다.
‘이 먼 곳까지 와서 무슨 고생이지? 나... 잘하고 있는 것 맞아?’
불안함에... 복잡함에... 자책감에... 잠이 오질 않는다.
‘남편한테 뉴욕 구경시켜준다고 엄청 떵떵거렸는데...’
그렇게 뉴욕에서의 첫날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운다.
직장맘의 육아휴직 레시피 – 두 아이와 미국 세 달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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