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기나무(1) 낙망스럽다가도 담박하고 쓸쓸하다.
여름, 밑동에서 바라보는 박태기나무 캐노피는 참 편안하다. 둥글넓적한 잎 끝이 약간 안쪽으로 말려 있다. 잎 수백 장이 하늘을 꽉 채웠다. 비 오는 날 우산은 없고, 어른들이 손끝을 힘을 쥐며 아이들 머리를 가려준다. 꼭 그러는 것만 같다. 캐노피 아래 덜 익은, 얇은 콩꼬투리들이 주렁주렁 풍요롭다. 덩달아 1~2시간만 앉아 있으면 햇빛과 구름 그리고 박태기나무 잎이 만들어내는 초록빛 농담(濃淡)을 즐길 수 있다. 삶에 낙망스럽다가도 이 순간만큼은 담박하고, 끝내 쓸쓸하다.
자줏빛 쌀 알갱이 같은 작은 꽃봉오리 10여 개씩 뭉태기로 피어나는 화려한 봄 박태기나무만큼이나 여름 박태기나무에도 매력을 넘친다. 오월도 되기 전에 봄 꽃 잔치를 일찌감치 끝낸다. 그리고 잎을 틔우고 한 뼘 정도 우듬지 위로 새 가지를 낸다. 그렇게 딱 1년 성장을 마치고, 푸르고 또 푸르다.
가난한 집 좁은 뜰의 박태기나무
박태기나무는 중국에서 전해졌다. 중국에서도 그렇게 흔한 꽃은 아니다. 험준한 산의 계곡 쪽 가파른 비탈이 그 자생지다. 산에는 키 크고 잘난 ‘부자’ 나무들이 참 많다. 부자들이 잎을 틔우면 박태기나무 입장에서 볕을 마음껏 쬘 수 없다. 3~4m로 키는 작고, 빼빼한 덩치(몸통줄기, 樹幹)도 내세우기 어렵다. 그래서 박태기나무는 일찌감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성장까지 끝낸 뒤, 이듬해 잎과 꽃을 틔울 힘 비축에 들어간다. 그렇게 아껴 쓰니, 느리지만 억세고 강인하다. 그런 성품 덕에 가난한 집 좁은 뜰에서도 잘 산다. 척박한 도시에서도 자줏빛 잎 찬란함을 잃지 않는 비결이다.
박태기라는 이름은 밥티나무, 밥태기나무라고 한 데서 왔다. ‘밥티’나 ‘밥태기’는 밥알이라는 뜻이다. 자루도 없이 줄기에 옹기종기 모여 틔운 꽃눈 모양에서 온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붉은 쌀이라고 해도 박태기나무의 환한 파스텔톤 자줏빛과는 사뭇 다르다. 고향인 중국에서는 자형(紫荊), 자주(紫珠), 자화(紫花)라고 해 꽃의 빛깔을 이름에 담았다. 영어 이름도 붉은 꽃눈(Red Bud)다. 꽃눈의 모양 또한 자세히 보면 밥알보다는 버선을 닮았다.
봄의 장인이 만든 붉은 광석
중국 송나라 위상(1033~1105)은 '박태기꽃'(자형화, 紫荆花)라는 시에서 박태기나무 꽃눈을 봄의 장인이 만든 붉은 광석이라고 묘사했다.
자줏빛 고운 꽃이 봄의 끝뜰을 물들이고,
두보의 시심은 그 속에서 맑게 떠오르네.
늙은 용이 몸을 틀듯 굽은 가지,
붉은 광석 같은 꽃송이가 가지를 덮었네.
꽃의 등급에는 본래 없지만,
봄의 장인은 따로 그 정을 두었네.
복숭아나 자두꽃처럼 흔하지 않으니,
속된 눈으로 얕보지 말라네.
紫艳暮春庭,少陵诗思清。
老蛟蟠曲干,丹矿缀繁英。
花谱元无品,春工别有情。
不随桃李色,俗眼莫相轻。
송나라 위종무(卫宗武), -1289年)도 같은 이름의 시에서 박태기나무 꽃이 피고 잎이 자라는 과정을 '푸른 깃발 펼치기 전, 보랏빛 금모래 먼저 흩어지듯 피어나네.'(未张青羽旆,先糁紫金砂。)라고 풀어냈다.
키 큰 나무들처럼 굵은 몸통 줄기(수간, 樹幹)를 키우지 않고 밑동에서 바로 여러 갈래 줄기를 내는 박태기나무의 특징 때문에 탄생한 고사(故事)도 전해 진다. 그 이야기의 뼈대를 보면 한(漢) 나라 때 전진(田眞) 삼 형제가 있었는데, 재산을 나눠가지고 분가하기로 했다. 삼 형제는 집 앞에 박태기나무(자형紫荊) 한 그루까지도 나누기로 했다. 얼마 되지 않아 박태기나무는 말라죽었다. 큰 형인 진이 탄식했다. "나무 한 그루를 나누려 해도 말라죽는데, 사람이 형제간에 우애해야 하는데 떠나서야 되겠는가" 했다. 이 말에 삼 형제는 서로 감동하여 다시 합쳤다. 박태기나무는 곧 무성하였다고 한다.
박태기나무의 갈라진 줄기를 형제들로 비유한 건데, 나무에 대한 일방적인 이해를 나타내는 대목이다. 박태기나무의 갈라진 줄기는 한 몸을 이루는 부분이라 개별 인격체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오균(吳均, 469∼520)이 쓴 판타지소설집(志怪小說集)인 '속제해기'(續齊諧記)에 나오는 이야기다. 형수부생(荊樹復生, 박태기나무가 다시 살아났다)이라는 사자성어가 여기서 만들어졌다. 이런 기괴한 이야기가 현대 중국에서는 홍콩, 대만 등이 중국 본토와 합쳐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다.
그 가난한 이름을 불러본다
입으로 입으로 전해져 오며 밥알을 떠올린 그 이름의 기원을 이름 붙인 사람을 붙들고 묻고 싶을 뿐이다. 물론 이런 정서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박태기나무라는 이름은 너무도 소중하다.
살고 있는 아파트 분리배출장 옆에 박태기나무가 있다. 오고 가며, 그 가난한 이름을 불러본다. 박태기도 좋고 밥태기도 좋다. 때론 가만히 서서 말을 걸어본다.
*박태기나무(2)로 이어짐.
<박태기나무>
박태기나무(1) 낙망스럽다가도 담박하고 쓸쓸하다.
박태기나무(2) 봄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나무
박태기나무(3, 끝) 달라진 것은 박태기나무를 읽는 도시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