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서(2) 상록이라는 기술
목서(1) 꽃의 색감과 향기만으로는 부족한, 목서를 찾아서에서 이어짐
꽃이 없는 계절에도 목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인식에서만 사라질 뿐이다. 9월의 향기가 걷히고 나면, 목서는 다시 ‘나무 일반’ 속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캐노피 아래로 한 발짝만 들어가면, 목서는 여전히 자기 삶의 전부를 수행 중이다.
여름의 끝자락, 서울의 아파트 단지에서 목서는 짙푸른 잎을 겹겹이 포개고 서 있다. 잎은 반짝인다. 마치 얇은 유약을 발라놓은 듯한 광택이다. 손으로 만지면 생각보다 단단하고, 잎 가장자리는 미세하게 뾰족하다. 이 반짝임과 단단함은 장식이 아니다. 목서가 사계절을 버티는 방식이다.
반짝인다는 그 생존의 흔적
상록활엽수의 잎은 대체로 두껍다. 잎 표면에는 큐티클층이라 불리는 보호막이 발달해 있다. 수분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겨울의 찬 바람과 여름의 강한 일사를 동시에 견딘다. 광택은 그 결과다. 빛을 반사해 과도한 에너지 유입을 줄이고, 동시에 잎의 내부를 보호한다. ‘반짝인다’는 감각적 인상은, 사실 생존의 흔적이다.
물론 잎이 반짝이는 것은 목서만의 특징은 아니다. 이는 열대와 아열대, 그리고 동아시아 난대 남부에서 널리 분포하는 조엽수림(照葉樹林)의 전형적인 형질이다. 강한 일사와 높은 습도, 그리고 계절 간의 급격한 환경 변화를 견디기 위해 이 숲의 나무들은 두껍고 단단한 잎, 잘 발달한 큐티클층을 갖는다. 반짝임은 장식이 아니라, 빛을 흘려보내고 수분을 붙잡기 위한 생존의 기술이다.
목서의 잎이 서울의 여름 햇빛 아래서도 유난히 광택을 띠는 이유는, 이 나무가 본래 그러한 숲—조엽수림—의 문법을 몸에 새긴 채 살아가기 때문이다.
목서는 겨울에도 잎을 떨구지 않는다. 대신 광합성의 강도를 조절한다. 기온이 낮고 빛의 각도가 낮아지면, 잎은 적극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그저 살아 있는 상태를 유지한다. 상록이란 늘 푸르다는 뜻이 아니라, 늘 준비된 상태로 머무는 전략에 가깝다. 빠르게 자라기보다, 오래 남는 쪽을 택한 생명이다.
캐노피 아래의 공기는 다르다. 한여름에도 목서 아래는 상대적으로 서늘하고, 습도가 유지된다. 잎이 빛을 걸러내고, 바람의 속도를 늦춘다. 이 작은 차이가 나무 아래의 토양을 바꾼다. 수분은 오래 머물고, 미생물과 곤충이 살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사람에게는 잠시 쉬어가는 그늘이지만, 목서에게는 또 하나의 생태계를 품는 공간이다.
도시의 변덕을 흡수
몸통으로 시선을 옮기면, 수피는 의외로 매끈하다. 거칠게 벗겨지지 않고, 단단하게 닫혀 있다. 손바닥에 닿는 감촉은 나무라기보다 돌에 가깝다. 이 매끈함은 연약함이 아니라, 쉽게 상처를 내주지 않기 위한 선택이다. 도시의 나무에게 수피는 보호막이자 방패다. 염화칼슘과 열기, 반복되는 전정의 흔적들이 모두 이 표면에서 먼저 멈춘다.
우리는 흔히 나무의 꽃을 ‘보상’처럼 생각한다. 오래 버텨온 나무가 잠시 허락하는 선물처럼. 그러나 목서에게 꽃은 짧은 사건이다. 생의 대부분은 잎과 수피, 캐노피와 그늘로 이루어진다. 꽃이 없는 11달 동안, 목서는 자신의 본업을 충실히 수행한다. 빛을 조절하고, 수분을 지키고, 도시의 변덕을 흡수한다.
그래서 목서를 꽃으로만 기억하는 일은 어딘가 불편하다. 그것은 목서의 삶을 가장 짧은 장면으로만 요약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목서라는 이름이 꽃이 아닌 수피에서 비롯된 까닭도, 어쩌면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향기는 사라지지만, 몸은 남는다. 계절이 바뀌어도, 캐노피 아래의 세계는 계속된다.
상록이라는 기술의 정수
목서는 오늘도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서 있다. 그러나 그 ‘아무 일 없음’이야말로, 상록이라는 기술의 정수다.
목서(3) 향은 누구에게 가는가으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