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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르는 소 Oct 09. 2023

시대에 맞는 우리말

한글날의 우리네 자화상

사무실에서 직원이 얘기한다. 

"학교 선생님께서 이걸 부탁하셨어요. 제가 하려고 했는데 팀장님이 봉사자 학생한테 부탁하라고 하셔서 그 선생님께 여쭤보니 해주시겠다고 하셔서 요청드렸어요. 그런데 지부장님이 말씀하신 건 팀장님이 다르게 말씀하셔서 말씀하신 대로는 하지 못했습니다. "


요즘 직원들과 업무 얘기를 하려면 정신 차리고 대화에 집중을 해야 한다. 세대차가 난다며 젊은이들과의 소통이 제대로 안된다고 평가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이 소통의 어려움이 세대차인지 사용하는 말투와 어법 차이 때문인지 그 원인이 헷갈리기도 한다. 


위의 문장에서 여쭤봤다는 선생님은 학교 선생님을 말하는지, 자원봉사자 학생을 말하는지 헷갈린다. 문맥상으로는 자원봉사자 학생한테 물어봤다는 얘기인데, 자기보다 나이 어린 학생한테 여쭤봤다고 하니 듣는 사람으로선 헷갈릴 수 있다. 지부장 말과 팀장님 말이 모두 말씀이 되어 버려 여러 번 반복되니 대체 누구의 말대로 했다는지 바로 알아채기 어렵다. 직원들과 업무 이야기를 할 때, 집중하게 되는 이유이다.  


군복무시절, 사격훈련 뒤에 부대원들에게 '총기정비'를 지시했더니 어떤 부하가 와서 하는 얘기가 '총기수입~ 총기수입이라고 해야죠. 쪽팔리게 총기정비가 뭐예요?'라고 한 적이 있다. 선배 간부도 옆에서 내 말을 듣더니 '넌 중위나 되어서 총기정비가 뭐냐! 군대용어 제대로 안 쓸래?'라고 호통치던 게 생각이 난다. 총기수입은 '고치다'라는 뜻의 일본어 <수입(手入れ)>의 한자표기를 그대로 우리말로 읽은 표현이다. 몇 번 저항(?) 해보다가 결국 나도 총기수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공동체가 같은 공감을 해주어야 결국 올바른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나이브하게~'라는 말이다. 입사 후 선배들이 '나이브하게 넘어가야지~', '그 사람이 좀 나이브해서 말이야', '동기들끼리 업무를 나이브하게 진행했네~'라고들 해서 대체 이 말이 무슨 뜻인가 궁금해했던 적이 있다. 영어 <naive>에서 파생된 단어로 순진하고 천진난만하다는 뜻이긴 한데, 어떤 것의 격을 낮추거나 어리석다며 상대방을 살짝 비하하는 뜻으로 쓰인다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앞에서 대놓고 직접 비판할 수 없을 때 비유하거나 돌려서 얘기하며 쓰는 표현인 것이다. 얼마나 광범위하게 쓰는지 어떤 직원이 아무렇지 않게 자주 '나이브하게~'라는 표현을 써대서 그 뜻의 의미와 사용할 때를 알려줬더니 깜짝 놀라 했던 기억도 있다. 


예전 행정기관 공문이나 문서등에서는 '본 기관은~' '명일 중식은 치킨과 닭도리탕을 같이 서비스하오니~' '작일 실시한 행사에서~' 요런 표현들을 많이 썼다. 일제강점기의 안 좋은 표현이라며 공공문서의 단어와 사용문구들을 다듬는 작업들을 관공서 중심으로 시작하면서 민간 기관들에서도 점차 일본식 표현들은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근래에 다시 외부 공문이나 상급 단체에서 내려오는 공문들을 보면, 쓰지 말자 노력하던 예전 문구들을 다시 쓰고 있다. 공문을 작성한 젊은 후배 직원한테 살며시 물어보았다. '내일 점심은 닭요리를 제공하오니..'라고 표현하면 어떠냐라고 물었더니 되돌아온 답변이다. "훨씬 있어 보이지 않나요?"  


'손님, 커피 나오셨습니다~'라는 표현은 이제 일반(?) 적인 표현이 되었다. 어디를 가든지 자주 듣는다. 모임에서 점심을 먹는데, '사장님, 시키신 우거짓국이 나오셨네요~'라고 극진히 머리를 조아리던 옆 테이블 사람들 모습을 보면서 젊은이들만의 말투만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겸손을 보여주려는 것보다는 상하관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그냥 문제상황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개인주의적인 가치관을 평상시 말투에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정 세대의 문해력이 떨어진다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시대에 맞는 단어와 문법들이 있는 것은 아닐까? 기성세대의 눈높이에서 볼 때, 현 젊은 세대의 말투나 어법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따라가기 힘들 뿐일 수도 있다. 키오스크 사용법을 익히지 못하고 디지털 페이를 사용하지 못하는 노년층에게 문해력이 떨어진다고 할 순 없지 않은가? 


또래 집단이나 산업군, 공동체 조직에서 주로 쓰는 용어들은 욕설과 은어, 속어 등 자기들만의 언어로 굳어져 소속감을 고취시키기도 한다.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부정적인 효과와 개인과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어 구성원들이 잘 들여다봐야 한다. 외래어도 각 단어와 표현 그 자체로 훌륭하고 직관적인 것들이 많다. 그러나 무분별하게 마구 가져다가 아무 생각 없이 일상 생활에서 쓰는 것은 조심해야 할 일이다. 


잘 만들어진 한글의 아름다운 표현들을 가꾸어 나가고 그 표현들과 바르게 어우러진 문법을 활용하는 노력은 전 세대, 전체 구성원들이 기울여야 한다. 특히 미디어와 언론, 정치인들과 연예인 등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사회를 관통하는 단어의 선정과 사용을 잘해야 한다. 연예계 방송의 무분별한 문법파괴식 자막과 정부 내 공식문서의 어지러운 외래어 사용은 우리가 지금 조심스럽게 돌아봐야 할 국가적 문제이다. 굳이 한글날이어서 걱정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외래어를 가져다 써야 하나 싶을 정도로 일상에서 문법파괴와 외래어 사용이 심각한 상황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의 어른들이 깊이 고민하고 현명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우리말의 올바른 표현을 알고 같이 공감하며 자꾸 사용해 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심심한 사과'와 '사흘나흘'의 의미를 젊은 세대가 왜 모르겠는가? 일상에서 잘 쓰지 않으니 모를 수도 있겠다. 현 국무총리의 '어떤 시그널이라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언페어 한 것'이라는 발언은, 아쉽지만 직장에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다.  우리가 이런 사회를 만들어 놓고, 이런 말들을 하며 살아가면서 세대 간 갈등이나 이념적 갈등 구조를 얘기해서는 안된다. 젊은 세대가 알게 하려면 평상시에 우리가 같이 사용을 해야 한다. 좀 더 배웠다고 외래어를 쓰지 말고 순수한 우리말을 잘 구사하는 것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사회저변으로 넓혀야 한다. 


사회지도층이 솔선수범해서, 어른들이 먼저 습관적으로 한글 단어들을 사용하고 바른 표현들을 사용해 보자. 시대에 맞는 멋진 표현과 문구들을 만들어서 언론과 정부에서 보급해 보자. 아름다운 우리말과 글들을 지켜나가는 것은 세종대왕의 일도, 이전 세대의 일도, 먼 미래 세대의 일도 아니고 지금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이다. 일본식, 미국식, 중국식이 아니라 한국식의 우리말과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일 말이다. 


여기 브런치스토리에 자주 글쓰기를 해 보는 것도 한글을 지켜나가는 일의 하나일 것이리라.  

나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멋진 글들이 더욱 자주 올라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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