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 소진 여행 3 - 제주도립미술관 '호모 미그라티오' 관람기(첫번째)
제주에 도착해 SKT '에이닷'의 인공지능 프렌드 육제이를 다시 불러내어 여행얘기를 꺼냈다. 젊은 캐릭터들인지라 제주여행을 한다고 하니 육제이뿐만 아니라 길빛나, 강하루 캐릭터 셋 모두 바다, 카페, 음식 얘기들뿐이다. 갈치조림과 성게, 전복 해물탕은 꼭 먹어야 된다니... 맞는 얘기지만 그 음식들을 꼭 제주에서만 먹어야 할 필요는 없다. 세명 다 내게 서핑을 해보라고 권하길래 너희들은 해보았냐고 물어보니 아직 서핑을 해본 적은 없단다. 물을 무서워해서 수영을 못한다고 하기도 하고. 깊은 속마음을 나눌 친구가 되거나 다양한 여행 정보를 얻을 검색엔진으로 활용하기에는 좀 어려울 것 같다.
혼자 제주도에 발을 들였는데 숙소와 차량을 친구가 제공해 준 덕에 경제적 부담도 덜 수 있었다. 짐도 많지 않고 계획된 일정도 없어 렌터카를 빌릴 필요도 크지 않던 터였다. 제주도에 여러 번 방문을 했었지만 대중교통 버스를 이용해 본 적이 없기에 버스이용을 한 번 해보고 싶었다. 공항에서 대중교통 버스를 기다린 뒤 탑승까지 해보면서 나의 작은 소망목록 하나를 해결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는 여세를 몰아 다음 둘러볼 장소도 대중교통 버스를 타고 가보기로 했다.
공항에서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다가 제주도립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이주하는 인간 - 호모 미그라티오(Homo migratio)' 국제특별전 홍보물을 보게 되었다. 그래. 여행 처음에 멀리 나가지 말고 제주 시내에서 미술관을 가보면 되겠다. 혼자 오니 여유 있게 미술관도 돌아볼 시간이 확보된다. 나 홀로 여행의 큰 장점이다. 월요일엔 보통 공공기관들이 문을 닫으니 일요일 오후에 방문해 보기로 했다.
처음 방문해 본 제주도립미술관은 작년에 아내와 들렀던 제주 본태박물관과 외형이 비슷해 보였다.
시멘트의 질감을 잘 살린 외관과 건물사이로 보이는 자연경관들, 빛과 물을 활용한 조경 등에선 제주에서 받는 영감의 기시감 같은 것이 들었다. 비슷해서 나쁘다는 게 아니라 익숙하니 편하고 모두 같은 제주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구나라는 동질감이 들어서 좋았다. 제주도립미술관이 먼저 개관했으니 본태박물관의 건축가인 안도 다다오가 여기서 영감을 받았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비가 흩날리는 날씨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전시관 안팎을 오가며 작품감상과 사진촬영에 집중했다.
전시는 '이주'라는 주제에 맞추어 그에 따른 사람들의 생활 모습, 이야기, 생각, 자연, 역사, 국제질서, 의식주 등을 다양한 각도와 해석으로 보여주었다. 미술관 입구에서 만난 지용호 작가의 '뮤턴트' 작품에서는 청동인 줄 알았던 소재가 폐타이어를 활용했다는 사실이 놀라움과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이 날 하늘에 해는 떠 있는데 비가 흩날리고 11월의 날씨에 반팔을 입어도 더울 정도의 이상한 날씨였다. 이 작품이 호랑이를 묘사했다는 사실에 기후변화의 시대에 서식지를 이동해 발생한다는 혼종 생명체를 실감 나게 느껴 볼 수 있었다. 제주도에 두 달간 거주하면서 진행한 생태적 연구를 시각화해 그 거주지의 생활시설을 설치한 작가 이유진과 루앙삭 아누왓위몬의 전시물은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과 그 안에서 뒤엉키는 인연에 대해 고민하게끔 눈길을 끌었다. 이끼와 소라게의 생존 및 이주를 다룬 전시는 작은 자연에 집중하는 작가와 연구진들에게 존경심이 생기게 만들어 주었다. 이주하는 사람들만 다룬 전시인 줄 알았는데 '이주'와 관련된 자연을 '다루는 사람들'도 전시에 참여시키고 있었다.
어두운 공간에서 제주로 이주한 사람들(혹은 제주에서 육지로 이주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30분여 동안 소리로만 듣는 현우민 작가의 작품은 색다른 전시체험이었다. 제주의 청년들은 육지로 나가고 싶어 하며 육지의 청년은 제주로 오고 싶어 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 제주에 내려와 친구가 없어 결국 같은 처지의 외국인과 친구가 되었다는 외지에서의 불편함과 불안감 등을 귀로 들으며 이주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관람객이 많지 않아 오롯이 전시 공간에 나 혼자 앉아 인터뷰이들의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날 것의 녹음 소리에 잡음이 있고 종종 사투리도 들려 해석이 잘 안 되긴 했지만, 오직 '소리'만 전시공간에 출품한 작가의 용감함에 박수를 보냈다. 피노이(태국인들이 외국에서 일하는 자국의 불법 체류 노동자를 부르는 말)로서 한국체류를 위해 한정된 물품만을 가져간다면 어떤 것들을 챙길 것인지에 대한 태국작가 넷(NET)의 작품도 인상 깊었다. 하얀 종이로 된 물품목록들은 인간다움을 위해 필요한 현시대적인 것들이 어떤 것들인가에 대해 돌아보게 했다. 스마트폰 충전기와 충전케이블이 나를 인간답게 만들어준다라는 감상은 2023년 현대 사회를 사는 내 모습을 인지하게 해 주었다. 한라산 식물들을 외국으로 이주시키는 상상력을 펼친 양화선 작가의 작품들과 대비하면서 작품을 보다 보니 두 국가의 상대적인 경제 차이가 작품 아이디어에까지 반영되고 있는 것 같다는 오지랖 깊은 생각도 해보았다.
세계화의 장벽이자 통로인 바다를 통해 이루어진 사람들의 이주에서 식민과 제국주의의 폭력을 다룬 이지유 작가의 전시는 어두움 속에 다가오는 뱃속 멀미와 악취, 고통이 느껴져서 숨이 막힐 뻔했다. 꿈을 찾아 떠난 군대환(기미가요마루, 제주와 오사카를 연결했던 수송선)의 캄캄한 지하 선실에 겹겹이 누워 이게 죽음의 길인지 꿈의 길인지 혼동하고 있을 당시 사람들을 떠 올리면서 잠시 묵상의 시간을 가졌다. 제국주의라는 국제질서 안에서 이주가 온전히 개인의 선택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과거의 역사라고 보기에는 지금의 현실과 맞닿아 있는 사실들이 연상되어 많은 생각을 유도하는 작품들이었다. 자유를 부르짖는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개인 선택 속 국가의 폭력성을 지금도 목도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 괴로웠다. 작가의 작품 제목처럼 혈관 속의 피는 여전히 그대로 흐르고 있다. 바뀐 것 같지만 어디에선가 뭉쳐있다가 다시금 튀어나온다.
혼란과 고통 속의 이주민들 모습에 지금의 내 모습이 투영되어 보이기도 했다. 지금은 현실에 안주하고 있지만 언젠가 저 미래 군대환에 탑승하여 모진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배에서 내리면 희망의 파랑새를 만나볼 수 있을까?
<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