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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르는 소 Jul 03. 2023

세상의 외장하드님들 파이팅!

외장하드 단상

아들이 외장하드 좀 빌려달라고 해서 찾아 빌려주었다가 오랜만에 외장하드에 접속해 봤다. 뭐 이리 쓸데없는 자료가 많냐. 태블릿이나 컴퓨터를 바꿀 때, 백업해 둔 파일이 이중삼중으로 엉키면서 중복된 사진, 자료파일들도 많고 10여 년간 열어보지도 않은 파일들도 많다. 언젠가는 정리하겠지, 열어보겠지라며 저장강박증 걸린 사람처럼 꼭꼭 쟁여놓은 목록들이 눈에 띈다. 이런 자료도 만들었었던가? 이런 사건도 있었구나! 라며 과거로의 추억여행도 재미난다. 


눈에 들어오는 파일명 하나가 보인다. 2011년에 인생주기표(인생달력)라는 것을 만들었다. 2011년부터 50년 이후까지의 인생표를 만든 건데, 각 연도별 나이와 가족들 나이, 승진예정일, 아이들 상급학교 진학, 가족의 주요 행사 등이 정리된 표이다. 이렇게 만들어 두면 개인과 가족들의 미래상황을 예측해 볼 수 있고 중장기 인생계획을 잘 세울 수 있어 여러모로 유익하다. 어떤 사람들은 100년 주기표를 만들어둔다고들 하는데 그때그때 자기 상황에 맞춰 작성해 보면 개인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돌아보고 준비하는데 도움이 많이 된다. 

인터넷에 '인생달력'이라고 검색어를 넣으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인생주기표. 엑셀로 간단히 만들어도 된다. 


2011년에 직장내 직급이 차장이었다. 당시 직장내 인사혁신을 하면서 차장이상의 직급을 모두 L급(리더급)으로 통합하였는데, 통합 이후 직급중심의 승진체계가 없어졌으니 내가 어떤 직급에 해당하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지금 와서 인생주기표를 들여다보니 현재 내 직급이 당시 직원자격으로 제일 높게 올라갈 수 있는 국장직급이다. 오 마이 갓!

예전 국장님들은 무척 어려운 선배님들이었다. 말씀한마디가 법 같았고 행동 하나가 무게감으로 경외스럽기까지 했다. 나한테는 전혀 올 것 같지 않던 국장직급이 이미 한참 지나있었는데, 느낌이 묘했다. 아직 한창 일하는 과장 같은 마음인데, 조직의 국장급 직원이라니! 신기하기도 하고 단순히 나이먹음에 씁쓸해지기도 한다.


외장하드속에서 과거 힘들게 마련한 집의 취득가격을 보면서도 새삼 놀랐다. 꽤 많이 올랐구나. 좁은 집이라도 남의 집 말고 내 집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하고 싶었다. 많지 않은 급여에 그때도 영끌하면서 집을 샀는데,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이었다. 그때랑 지금이나 직장인들의 급여는 큰 차이가 없는데 자산가격이 이렇게 올랐으니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청년세대에 미안한 마음도 든다. 이러니 청년세대들이 미래가 없다고들 자조하지. 어떤 게 모두에게 바람직한 해결방법인지 고민해 본다.  




외장하드를 보고 있자니, 예전 직급의 국장급인 현재 내가 외장하드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외장하드다. 온갖 것을 다 품고 있는 외장하드.


요즘 외장하드야 SSD기반의 고용량으로 나오니 자료검색이나 휴대성에서 USB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도 외장하드가 USB보다야 부피가 더 크니 작은 크기의 USB에 비해 기동성은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더욱 많은 자료와 부피가 큰 파일들, 장기보관이 필요한 여러 파일들은 결국 외장하드에 담아둬야 한다. 언젠가 필요할 때를 대비해, 지나간 과거를 보관하고자 외장하드에 보관한다. 언젠가 이런 파일도 있었어? 라며 수년동안 찾아보지 않던 자료를 열어보기도 하고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과거의 자료를 검색하기도 한다. 조직의 국장급 어른들이 딱 그런 존재 아니던가? 부동산이 계속 오르기만 하진 않겠지만 한정된 자원의 가격이 계속 떨어지기만 하지도 않는다. 똑같은 대출로 교통요지의 남의 집에 얹혀살 것이냐 외곽에서 내 집살이를 할 것이냐 문제도 외장하드를 들여다보면서 답을 찾아본다.  


필요 없을 것 같지만, 외장하드를 함부로 버리면 안 된다. 누군가 그 안의 정보와 자료를 속아내어 이득을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인의 소중한 과거가 통째로 사라질 수도 있다. 내 귀중한 경험을 아무 대가 없이 빼앗길 수 있다. 돈을 좀 더 주고 최신 SSD기반의 외장하드를 구입했으니 기존의 HDD기반 외장하드는 버려야 하나? HDD기반의 외장하드는 다소 느리긴 하지만 SSD기반의 외장하드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보관기간도 더 길다. 사람을 함부로 쓰고 버리거나 이 사람 저 사람 아무렇게 바꿔 쓰면 안 되는 이유를 외장하드를 보면서 느낀다. 언젠가 꺼내어 쓸 때를 위해 과거 어렵게 마련한 외장하드가 고장 나지 않도록 잘 관리하면서 자료정리도 효율적으로 해줘야 한다. 

신입직원부터 대리, 과장을 거쳐 국장급까지 모두가 하나의 외장하드이다. 우리 직원들과 동료들, 선후배 직원들을 더욱 소중하게 아껴야겠다. 


모든 조직의 외장하드님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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