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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환 Jun 12. 2022

주방 실장님 바뀌었습니다

회사 근처에 음식 맛이 좋지 않아 장사가 잘 안되는 음식점이 있었다. 어느 날 그 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큼지막한 입간판이 세워져 있는 걸 발견했다. 입간판에는 커다란 글씨로 ‘주방 실장님 바뀌었습니다!’라고 적혀있었다. 음식 맛을 크게 개선했으니 다시 들러달라는 의미를 담은 광고문구인 것 같았다. 효과가 있었는지 지나가던 점심시간 직장인들이 한 번씩 발을 멈추고 입간판을 바라보며 웃곤 했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사장님과 주방 실장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그만두고 나간 사람의 허물을 저렇게 전시하듯 걸어놓을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의 음식 서비스 문제를 모두 그 한 사람 때문이었다고 공개적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섬뜩했다.

내 직업은 게임 시나리오 작가이다. 내 상황에 대치해보면 그동안 스토리에 대한 악평이 쏟아지는 게임이었는데 나를 해고하고 다른 작가를 채용한 뒤 ‘시나리오 작가 바뀌었습니다!’하고 큰 글씨로 공지하는 것과 같은 셈이다. 상상만 해도 상처받는다. 구체적인 문자로 표현하는 것조차 힘들다.

일을 잘 해내지 못한 건 물론 미안한 일이다. 나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으니 뒤에서 비난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감내할 마음도 있다. 하지만 모두 문제는 다 이 사람 때문이었다고 공식적으로 동네방네 큰 목소리로 외치고 다니는 것은 너무하지 않나 싶다. 아무리 멘탈이 강철같은 사람이라도 저걸 버텨내는 건 힘들 것이다.

일을 못 하는 사람과 같이 일하는 것은 분명 스트레스받는 일이다. 나는 스트레스를 주는 쪽에 섰던 적도 있고, 스트레스를 받는 쪽에 섰던 적도 있다. 예의를 지키지 못했던 적도 많다. 양쪽 모두를 다 겪어본 입장에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단지 일을 못 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모욕할 수 있는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좌천도 인사 경고도 권고사직도 충분히 예의를 갖춰서 할 수 있다. 굳이 모욕을 주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다. 너무 마음이 힘들어서 무심코 무례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의식적으로 반성하고 고쳐나갈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주방 실장님 책임론을 개그로 승화시켜 재기를 노렸던 그 음식점은 그 이후로도 장사가 잘 안됐는지 몇 달 지나지 않아 폐업 절차를 밟았다. 사필귀정이라거나 정의가 승리했다 같은 생각은 딱히 들지 않는다. 단지 주방 실장님께서 그 입간판에 커다랗게 써 놓은 광고문구를 보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회사를 다니는 이상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해도 나도 주방 실장님과 같은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그 순간이 왔을 때 나는 입간판에 내 이름이 걸리는 걸 바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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