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환 Jun 26. 2022

사인동맹

집 근처에 유명한 우동 맛집이 있다. 버스 노선이 없는 곳이라 높은 언덕을 헉헉거리며 걸어 올라가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이 아주 맛있어서 자주 찾는 곳이다. 가게에 들어가면 한쪽 벽에 수많은 사인들이 장식되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유명 맛집이니 으레 그렇듯이 연예인들이 다녀가면서 남기고 갔다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지난주에 사인이 장식된 벽면 가까이에 앉게 되었다. 앉은 김에 어떤 연예인들이 사인을 하고 갔나 싶어서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한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명인들의 사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학원 원장, 무슨 회사 과장, 무슨 학교 체육 교사 등 평범한 직업을 가진 분들의 사인이었다.


유명인 사인인 것처럼 위장하여 마케팅을 해야할 만큼 모객이 간절한 가게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나도 모르게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다.


혹시 사장님께서 친하게 지내는 가까운 사람들의 사인을 모은 걸까? 아니면 단골 손님들의 사인인가? 친척인가? 이웃 주민인가? 추측은 난무했지만 당연히 정답을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이 사인 장식이 유명인들이 다녀갔을 만큼 맛있는 가게라고 자랑하는 의도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뽐내듯이 걸어놓은 줄 알았던 사인 장식이 격 없고 친숙하게 느껴졌다. 평범한 사장님의 지인들 모여서 ‘아, 내 친구 가게 우동 정말 끝내주니까 한번 먹어봐요.’ 하고 권하는 듯한 분위기가 나서 소리 나지 않게 살짝 웃었다. 나는 유명인보다 내가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더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듯한 사장님의 여유가 느껴져서 좀 멋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인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주문한 우동이 나왔다. 언제나처럼 우동은 몹시 맛있었다. 연예인 사인 없이도 충분히 맛집이 될 수 있을 만한 솜씨였다.


문득 만약 내가 자영업을 하게 된다면 나도 전 직장 옆자리 동료 누구, SNS 절친 누구, 세 달간 피아노 레슨 해줬던 선생님 누구 같은 식으로 친한 사람들 사인을 걸어두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물론 무료로 사인을 받아 오겠다는 몰상식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 대가로 얼마든지 내 사인도 제공해 드릴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단지 나를 일으켜 세울 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