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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환 Nov 25. 2020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사람의 몸에 새겨지는 세월의 흔적

수년 전 근무하던 회사 근처에 자주 눈에 띄는 남자 노숙자 한 분이 있었다. 회사 근처에 잠잘 곳을 마련해두신 건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하다가 커피라도 사러 나오면 항상 눈에 띄는 분이셨다. 겉보기에는 사십 대가훌쩍 넘어 보였지만 씻고 깔끔한 옷을 입으면 어쩌면 삼십 대일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드는 모습이었고, 무엇보다도 두 눈이 마치 대하드라마 주인공처럼 부리부리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분은 사람이 옆에 지나가든 말든 혼잣말을 무척 자주 했었는데, 주로 뭔가 직장 상사에게 항변하는 듯한 말이 많았다. 


“국장님! 그게 어째서 제 잘못입니까! 저는 실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 대사가 특히 기억에 남는데 국장님이라고 하니 어쩌면 방송국이나 신문사 같은 곳에서 일하셨던 분일지도 모르겠다(그 외에 국장이라는 직함이 존재하는 직장을 모른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직장 생활을 하시던 분인가 보다 정도의 느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혹독한 일정을 소화해내느라 녹초가 된 상태로 밤 11시가 넘어서 회사를 나왔는데, 어둑어둑한 골목길 한가운데에 그분이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동도 하지 않고 계속 우뚝 서 있는 뒷모습이 눈길을 끌어서 나도 모르게 멈춰 섰는데 그 순간 그분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일반인의 목소리가 아닌 분명히 훈련을 받은 것이 틀림없는 성악가의 목소리였다. 깊고 진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


겉모습은 풍화되어 이제는 빛나던 시절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닦아왔던 기예는 변색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빛바랜 몸으로 찬란한 목소리를 토해내는 모습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노래가 끝날 때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노래를 끝낸 그분은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았는데 눈이 마주치는 순간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골목길로 사라져버렸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라는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람의 몸에 쌓여 있는 세월과 사연의 깊이를 그토록 강렬하게 느껴본 적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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