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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환 Jun 05. 2022

단지 멋이 없을 뿐

개인적인 경험이나 유용함과 상관없이 그냥 존재 그 자체의 태생적인 물성만으로도 좋아하게 되는 물건들이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연필깎이, 아날로그 사진기, 나침반 등이 그런 물건이다. 이 물건들의 공통점은 오로지 단 한 가지 목적만을 수행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내 삶에 딱히 필요하지도 않고 쓸데도 없지만 그런 물건들을 손에 쥐고 있으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이 작은 물리적인 완성체가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탄생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로 멋지다. 방황하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고, 헤매지도 않고 올곧게 뻗어있는 그 물성의 순수한 의지에서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반대로 스마트폰은 참 멋이 없는 물건이다.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는 다재다능한 친구인 건 분명하지만 도구의 목적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복잡하다. 이제는 유용하고 편리한 생활필수품이지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왕 하는 김에 이런저런 것들을 추가로 더하기 위해 탄생했다는 태생적인 물성이 난잡하고 멋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마트폰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버스 도착 시간도 알 수 없고, 은행 업무도 못 보고, SNS도 못 하고 이래저래 생활이 무척 곤란해진다. 아주 고마운 도구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새로운 스마트폰을 살 때는 절약 회로를 잠시 꺼 두고 돈을 넉넉하게 투자하는 편이다. 이제는 수족의 일부처럼 되어 버린 물건이니 이런데 돈을 아낄 수는 없다.


한 가지 목적만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을 멋지다고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사람은 그렇게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태생적인 목적을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평생을 들여도 추구해야 할 단 한 가지의 목표나 사명을 찾는 것도 어렵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지만 도대체 왜 세상에 탄생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기 때문에 이것도 할 수 있게 되고 저것도 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삶은 스마트폰을 닮았다. 존재의 목적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경험의 확장성은 무한하다. 목적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이것도 해볼 수 있고 저것도 해볼 수 있다. 난잡하고 멋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미워하거나 외면하진 않는다. 분명히 좋아한다. 그저 단지 좀 멋이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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