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바로 필사이다. 꽤 거창해 보이지만 쉽게 말하면 잘 써진 글씨를 따라 쓰는 것이다.
나는 글씨체가 이쁜 편이 아니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글씨체를 바꿔보려는 시도가 처음은 아니다.
군 생활을 하면서 야간 상황 근무가 무료하면 책을 읽곤 했다.
그마저도 무료해져 졸음이 문 두드릴 때
아무 서류나 글씨 색을 옅은 회색으로 바꾸어 따라 쓰곤 했다.
잠도 깨고, 바른 글씨체를 따라 쓰다 보면 운동할 때처럼 잡생각도 사라지는 듯했다.
뭐 결국 그마저도 귀찮아져 오래가지 못했다.
일을 할 때 수기를 종종 쓰는 편인데
그때마다 여전히 글씨체가 마음에 안 들었다.
글씨체 교정이라고 검색하니 지금은 책처럼 쉽게 따라 쓸 수 있도록 여러 필사책이 많았다.
저렴한 방안지도 구매했다.
필사책을 펴보니 글씨체 교정에는 볼펜은 추천하지 않기에,
졸업 날 후배한테 받아 서랍에 두었던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처음 사용하는 탓에 잉크가 터져 손에 묻기도 했지만
이내 적응하니 쓱싹쓱싹 필기감이 꽤 마음에 든다.
필사를 루틴처럼 만들고자 매일 15분씩 쓰자고 정해두었었는데
지금은 그날 기분에 따라 내키는 대로 쓴다.
어떤 날은 한 줄, 어떤 날은 시 한 편.
필사를 할 때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클래식 중 가장 좋아하는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1번이나 아이유의 밤편지를 틀어놀곤 한다.
때로는 상황에 맞는 노래를 틀 때가 있는데,
예를 들어 최근 빠진 시인 나태주 시인의 ‘내가 너를’을 필사할 때이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이승환의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라는 노래를 듣게 됐는데,
찾아보니 그 노래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여대생 영란 씨와 그녀에게 사랑을 배운 창원 씨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영란 씨가 세상을 떠난 지 한참이 된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에 독신으로 사는 창원 씨가 인터뷰에서
“저에게는 그냥 선녀가, 선녀의 옷깃이 바위 스치는 일이 한 번 일어났던 걸로 감사해요.”
라고 남긴 말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노래를 들으며 댓글을 보는데, 저마다의 사연이 적혀있다.
어디선가 들었다.
잘 부른 곡에는 칭찬과 평가가 달리고, 명곡에는 사연이 달린다고.
그중에서도 나태주 시인의 시 ‘내가 너를’ 전문을 달아둔 댓글이 있었고,
특히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라는 마지막 구절은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가장 잘 대변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시를 필사할 때면 이승환의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를 틀어놓고 적는다.
이렇게 글로 적고 보니 조금은 궁상맞나 싶다.
그래도 이렇게 귀로 들으며 머리로 생각하고 손으로 쓸 때
미묘한 감정선이 맞춰지는 것이 꽤 기분이 좋다.
그나저나 이번 필사 프로젝트는 길게 가야할텐데.
추신
시를 궁금해할 분들을 위해.
내가 너를 - 나태주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몰라도 된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요
나의 그리움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차고 넘치니까…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