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춘래불사춘 Oct 27. 2021

우아한 삶이라는 것은.

안빈낙도를 다시 생각해 보다가


생활계획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아이의 지난여름 방학 때 생활계획표 만드는 숙제가 있어 현실적으로 만들어서 규칙적으로 생활하라 일렀건만 생각해보니 그런 소릴 할 입장이 못되었다.

룸펜으로서의 여유를 즐기자는 대원칙만 있었을 뿐 나의 생활은 중구난방 자체였고 오히려 딸은 정해진 시간에 학교를 가고 학원을 가고 숙제를 하는 등 아주 규칙적인 생활을 이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활의 중심을 잡아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당장 가지고 있는 고민들을 끊임없이 생각하다가 하루를 놓쳐버리는 날이 되풀이되는 것이 싫었다.


많은 날을 고민한 끝에 미래 걱정, 돈 걱정, 부부관계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지난날의 잘못된 선택들도 묻어놓고 오롯이 현재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를 생각하면 후회만 남고 미래를 생각하면 걱정만 되었으니까.


직장을 다닐 때는 주말이면 어떤 약속이라도 잡아 밖으로 나갔다. 대부분의 약속은 자연스럽게 음주로 이어지고 이야기는 주위 누군가의 성공담에 한참 머물렀다. 투자, 재테크 이런 단어들에 신음하다 집으로 돌아오면 공허했다. 주위의 잘 된 이야기들을 순수하게 축하해주기는 어려웠다. 그들과 비교된 나의 삶이 초라해지기 때문이었다.

당분간 주위를 둘러보는 것도 내려놓았다. 남과 나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아무튼 생활계획표를 짰다.


아이들과 아내를 학교, 유치원, 직장에 내려주고 돌아오면 내 시간이 시작된다. 먼저 거실 창문과 마주한 피아노 위에 놓인 티볼리 라디오를 켜 클래식 채널에 고정한다. 여자 아나운서의 교양 있는 목소리가 잔잔하게 흘러나오고 모차르트, 브람스, 베토벤의 교향곡, 협주곡이 곧 거실과 주방 전체에 울려 퍼진다.


나는 찬장을 열어 그 순간에 어울릴 차를 고른다. 얼그레이, 히비스커스, 구기자, 꽃차, 당귀. 한구석에 처박아놓은 다기세트도 찾았다. 드립커피와 캡슐커피, 더치커피도 종류별로 사놓은 것이 꽤 되었다. 선물받았던 커피잔들도 하나씩 꺼내 사용해 보기로 했다.


클래식을 듣고 차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는 고고한 행위.


그러다 심심해지면 서재의 책장에 장식용으로 꽂혀만 있던 고전 문학들을 천천히 살펴본다. 앵무새죽이기나 안나카레리나와 같이 제목만 들어본 책들을 굳이 꺼내어 꾸역꾸역 읽어 내려간다. 역시 문학은 인간을 구원하고 영혼을 치유한다는 것이 와닿는다.


배가 고프다. 냉장고를 열어 오늘의 메뉴를 정한다. 스파게티 소스가 유통기한이 임박하여 그것을 처리하기로 한다. 마침 양파, 마늘, 토마토도 먹어야 할 참이다. 면을 삶고 야채를 볶고 소스를 잘 버무리니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파스타 값이 너무 비싸게 느껴졌다.


포만감은 수면욕을 불러일으킨다. 누워서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볼 시간이다. 드라마와 영화도 좋지만 이제는 평소 흥미를 가지고 있던 주제와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보기로 한다. 우주, 별자리, 고대 문명, 오지여행, 동물의 세계, 기후변화와 같은 다큐를 보다 보면 자면서도 지식이 쌓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시간을 더 쪼개어 그날의 영국이나 홍콩의 증시 상황을 체크하고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영자신문도 읽고 싶지만 여기서 그치기로 한다. 아이들을 다시 데리러 갈 시간이다.


침묵하며 현재의 나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순간들은 인생에서 길지 않다. 눈을 감을 때 후회할 것들은 최대한 줄여보고 싶었다. 시간을 의미있게 쓰는 능력이 남들에 비해 현저히 부족하기에 시간이 흐르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다.




작가의 이전글 휴직 중, 꼭 한 번씩 찾아오는 슬럼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