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고 나서, 정확히는 스무 살에 대학에 입학하면서 나는 고향과 엄마 품을 떠났다. 이후로는 방학 때나 명절, 고향이 그리울 때, 그리고 삶이 힘들어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을 때마다 엄마를 찾아갔다. 중학생 때 아빠가 돌아가셨고 그곳에 남아있는 친구들도 이제 없기에 나에게 고향은 그저 엄마이다. 보통 두 달에 한번 이상은 엄마 얼굴을 보고 살았고 전화통화는 이틀에 한번 꼴로 하고 있으니 평균적인 아들들보다는 살가운 편에 속한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요즘은 엄마랑 있으면 옛날 얘기를 많이 하게 된다. 나도 부모가 되었으니육아에 대해 어떠한 공감대를 형성할 자격이 됐다고 생각하신 지 내가 어릴 적의 에피소드들을 자주 말씀하곤 한다. 그때마다 그 에피소드에 관한 얘기에 다른 이야기가 이어지고 그러다 보면 필수적으로 어느새 엄마가 시집살이한 이야기로 넘어가 있다. 일상적인 대화 중에는 항상 차분하던 엄마는 시집살이 이야기를 할 때는 다소 격앙된 어조로 변하고 목소리 톤도 살짝 높아진다. 그러곤 이야기의 끝에 항상 토로하듯이런 말을 덧붙인다.
엄마 시집살이 한 얘기는 진짜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라.
그래서.
써보기로 했다. 엄마의 시집살이에 대해.진짜 책 한 권의 분량이 나오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엄마를 대신해서 내가, 종이책 대신 브런치에라도.
엄마는 경상북도 북부의 전국에서 손꼽히는 오지인 '군'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총 5남매 중 둘째이자 맏딸로 태어난 엄마는 부유하지는 않지만 화목하고 우애 좋은 형제들 사이에서 자랐다. 당시로서는 평균적인 학력 수준 이상으로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몇 군데의 회사에서 일하다가 아빠를 만나 결혼했다.
아빠는 역시 경상북도 북부지역의,엄마의 고향과 인접해 있는 조금 더 큰 '시'에서자랐다. 역시 5남매 중 셋째이자 차남이었다. 안동으로 대표되는경북 북부의 문화가 그러하듯 아빠의 집안 역시 보수적이고 엄격하며 전통과 가문, 족보를 중시하고 위신과명예가돈과 실속보다 중요한 그런 가풍을 가진 집안이었다.
당시 결혼은 대부분 중매에 의해 이루어졌다. 지역마다 포진해 있는 전문 중매쟁이들이 각각의 인맥과 정보를 통해 20대 중후반의 결혼 적령기에 이른 남녀들이 주위에 있으면 집안 살림 수준과 경제적 안정성을 기준으로 결혼을 전제한 만남을 주선했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취향이나 성격, 가치관 등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엄마도 스물다섯, 나이가 차자 외할머니가 알고 있는 어떤 중매쟁이에게 아빠를 소개받았을 것이다.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는 아빠와 동네에서는 제일 좋은 집이라는, 포도나무와 은행나무, 앵두나무가 있는 아빠가 살고 있던집을 기준으로 이 정도면 딸이 시집가서도 그럭저럭 잘 살 수 있겠다는 판단을 외조부모께서는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그렇게 엄마의 시집살이는 시작되었다.
아빠가 살고 있던 집은 아빠가 아닌 할아버지의 집이었다.아빠는 장남이 아니었지만 큰아버지는 자식이 없었던 큰할아버지의 양자로 호적이 올라가 있어 아빠가 사실상의 장남 노릇을 해야 했다.(예전에는 이런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대를 잇는 것을 중요시하는 가문에서는 특히.)덕분에 엄마는 결혼하자마자 맏며느리 역할을 해야 했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수발을 들며 외롭고 고독하고 내편 하나 없는 시댁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현대한국사회에서 사라져야 할 인습 1순위로 꼽혀왔던, 그래서 지금은 거의 사라진문화.
남아선호 사상.
앞서 얘기했듯 보수와 전통을 중시하는 아빠의 집안에서도 이 문화가 고스란히 자리 잡고 있었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빠의 형제 5남매 중 고모한 분을 제외하고 아빠를 포함한 네 명의 남자 형제들.
그들은 각자 적당한 간격을 두고 결혼을 했고 또 자식을 낳았다. 큰집, 작은집들 모두각각 아이를 두 명씩 낳았는데 다들 약속이나 한 듯 연달아 남자아이였다.할아버지, 할머니의 기대에 철저히 부응함은 물론 그들 스스로의 자부심도 대단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