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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선 Sep 07. 2021

#4. 인생 첫 상사의 조언

직장생활 탄원서



똑똑똑. 금난초와 고무나무 화분이 열을 맞춰 놓인 복도 위로 나무판자를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세 번 울려 퍼졌다. 경영관리팀 소속 인사담당자인 신명호 대리는 원장 실을 조심스럽게 노크한 뒤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희미한 목소리가 들리자 신명호 대리는 고개를 돌려 뒤를 한 번 바라보고는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


"원장님. 안녕하십니까."


신명호 대리가 인사하자 줄을 지어 뒤따라오던 신입사원들도 제각기 허리를 숙였다.


"아, 신 대리. 좋은 아침."


짙은 회색 정장 차림에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읽던 신문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요번에 새로 채용된 신입직원들인데 오늘 첫 출근이라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인사드리세요. 김석규 원장님.”


회의실만큼 널찍한 원장실은 별다른 특색이라고 할 게 없을 만큼 소박했다. 그 흔한 난초 하나 없는 무채색의 방 안에서는 한쪽 벽면을 장식한 유색의 로고와 이사장의 넥타이가 가장 화려했다. 김석규 원장은 내빈들이 앉을 수 있도록 마련한 가죽소파의 정중앙 자리에 앉으면서 신입사원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다들 반갑습니다. 이리 와서 앉으세요. 저기, 임 비서한테 차 좀 내오라고 하지? 신 대리도 마시고 갈 거지?”


“아, 예. 원장님.”


사무실에는 잠시 어색한 기류가 돌았다. 어떤 이도 젖은 머리가 찰랑거리는 임 비서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가구가 별로 없어 유달리 공허한 사무실에는 찻잔이 테이블 위로 부딪히는 소리만이 청명하게 튀어올랐다. 원장과 신명호 대리는 각자 휴대폰을 보고 있었고 세 명의 신입사원들은 시선을 허공에 유지한 채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임 비서가 인삼차를 내고 마침내 밖으로 나가자 제일 먼저 원장이 말문을 열었다.


“어여 차들 들어요. 일단… 그 힘든 취직 전선을 뚫고 우리 조직의 일원이 된 걸 진심으로 축하해요. 여기 취직됐다고 하니까 부모님이 다들 좋아하셨죠?”


학인을 포함한 신입 직원들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자부심을 가져도 될 만한 곳입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지원했던 사람들 전부 채용해주면 참 좋았을 텐데…. 우리가 규모가 굉장히 작은 편이라 실정이 여의치가 않아서. 그렇죠? 신 대리?”


“맞습니다.”


학인은 원장의 따뜻한 마음씨에 감격했다. 그는 잠시 동안 팔을 팔걸이에 올리고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60대 남성을 관찰했다. 몸에 잘 맞는 정장에 반짝이가 들어가고 올이 나간 자주색 넥타이, 렌즈를 여러 번 압축한 듯 보이는 오래된 금테 안경에 상처가 아주 많은 스테인리스 시계. 숱 없는 허연 머리를 정갈하게 옆으로 넘긴 원장은 소탈해 보여도 나이에 걸맞은 품위를 지니고 있었다. 학인은 원장의 가장 가까운 우측, 그러니까 신명호 대리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는데 원장에게서 계속해서 풍기는 독한 향수 냄새에 시달려 코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향기가 어쩐지 그가 닮고 싶은 어른의 향이기도 했다.


“원장 실 치고는 좀 허름한가요?”


“예상보다는... 조금 그렇네요, 하하.”


발언의 주인공은 학인의 옆에 앉아 있던 남자 동기였다. 예상치 못한 그의 무례한 발언은 앉아있던 나머지 세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고 말았다. 의외로 정작 당사자는 뭐가 문제인지도 모른 채 씁쓸한 인삼차를 몇 번 홀짝거리다가 이내 먹기를 포기한 듯 인상을 쓰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하하, 요즘 젊은이들은 원래 이렇게 솔직하다죠?”


원장은 조금의 언짢은 기색도 없었다. 당돌하고 개념 없는 신입사원의 대답이 과연 농담으로써 치환이 가능한 정도인지는 사회생활에 빠삭한 신 대리조차 감이 오질 않았다. 원장의 얼굴을 면밀히 살피던 신 대리가 당황함을 뒤로하고 대신 나서 해명하기 시작했다.


“저... 원장님, 여기... 재혁 씨는 어렸을 때 미국에서 살았답니다. 확실히 보수적인 저 보다는 개방적인 면이 있어서 앞으로 저희 조직 문화 개선에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하하.”


신 대리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괜찮어. 괜찮아. 신세대답게 참 솔직하고 재밌구먼. 이 방이 그래도 옛날에는 썩 괜찮았는데 귀찮게 관리해야 하는 화분이나, 여러분들이 태어났을 적에 받았던 명패 그리고 액자까지... 내가 부임하면서 싹 다 치워버렸어요. 혁신을 위해서는 낡고 불필요한 건 과감히 버리자는 의미로 말입니다. 아참, 신 대리, 세 사람 사령장 수여는 언제 하지?”


“일단 수습기간 3개월이 끝나야 합니다.


“아 그랬던가? 헷갈리는구먼. 우리 신 대리는 몇 년차더라?”


“제가 올해로 6년 차입니다.”


“어이구! 벌써 그렇게 됐나? 여러분, 내가 여기 신 대리를 3년 전에 처음 봤는데 그때만 해도 표정도 별로 안 좋고 무슨 죄진 사람 마냥 고개도 푹 숙이고 있고……. 근데 지금은 이렇게 늠름한 선배가 됐잖아요? 직장생활 시작하면 시간은 정말 빠르게 갑니다. 여러분들 수습기간도 금방 끝날 거예요.”


원장은 말이 많아 한 번 자리가 마련되면 쉬지 않고 말하는 편이었는데 그나마 사람이 좋아서 직원들이 피하지 않고 애써 들어주는 편이었다. 


“자! 조금 뜬금없지만 내가 여러분들한테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난 면접장에서 여러분들을 못 봤으니까…. 혹시 왜 우리 회사에 오고 싶었나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세 사람 모두 두리번거리기만 할 뿐 말이 없자 원장이 대답을 듣기 위한 미끼를 던졌다.


“수습 때 밉보인다고 자르거나 하지 않으니까 편하게 이야기하세요.


고민하고 있는 두 동기를 번갈아보던 재혁이 다시 제일 먼저 대답했다.


“저는 솔직히 집이랑 가깝고 정년까지 잘리지 않는다길래 썼습니다.”


학인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동기 재혁의 당찬 어투는 직설적이고 솔직했지만 한국에서 조직생활을 함에 있어선 상식을 넘어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비록 당사자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이런 태도를 고수하는 것인진 몰라도 최소한 이 방의 모두가 느끼기에 그랬다. 그는 서로 의지해야 할 동기가 되려 상사에게 밉보일만한 빌미를 주는 것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음, 재혁 씨의 솔직한 대답 좋아요. 아마 나머지 분들도 비슷한 이유였을 거라 생각해요. 요즘같이 취직도 힘든 마당에 얼마나 큰 포부가 있었겠습니까? 정말 기업을 골라서 취직하던 과거의 고도 경제성장 시대를 살던 우리 때와는 또 다른 어려움! 난 이해합니다. 나도 여러분 또래의 자식이 있거든요. 다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게 있어요. 그래서 내가 오늘 첫날이니까 충고 몇 마디만 할게요. 아니, 듣기 좋게 순화시켜서 조언이라고 하죠. 신 대리도 잘 들어요. 자네가 신입 때는 내가 없었으니까."


“아, 네! 새겨듣겠습니다.”


신 대리가 무릎을 붙이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대답했다.


소탈하게 웃은 원장은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네 사람에게 조금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터놓고 말해서… 큰 문제만 안 만들면 짤일 일 없으니 고과에 치이는 사기업에 비하면 안정적이죠. 실제로 대기업에 몸 담았던 내 친구들 중 갑작스럽게 퇴직한 애들은 제대로 준비를 못해 꽤 긴 세월을 방황했거든요. 바로 이게 우리 같은 공공기관의 최고 장점입니다. 한데, 그로 인해서 매너리즘에 빠지기가 정말 쉬워요. 채찍이 적어 동기부여가 잘 안 되다 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의 열정은 식고, 노력은 안 하고,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서 내 의견이, 내가 살아온 방식만이 오로지 맞다는 편협한 사고에 빠집니다. 좋은 선배가 되지 못하니, 좋은 후배가 들어왔을 때 이끌어주지 못할 겁니다. 오히려 영리하고 눈치 빠른 후배는 훗날 무능한 선배처럼 되는 자신을 상상하며 조직을 떠나려 하겠죠. 누굴 탓할 수 있을까요? 자업자득이에요. 이게 조직에 아주 큰 위기라는 것을 한 번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 조직의 인력 이탈 현상은 갈수록 심해질 테고 자연스레 무능한 사람들만 남게 됩니다. 더 최악인 건, 그렇게 남은 사람들이 보통 자신만이 버텨냈다는 자아도취 상태로 인식이 굳어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남은 사람들로 운영된 기업은 어떨까요? 훌륭할까요? 성과는커녕 일은 아랫 직원들에게 떠넘기고 권력을 쥐고 방만경영을 할 겁니다. 그러니까 그걸 주시하던 외부에선 자꾸만 기관 존립에 대한 의구심을 갖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회사에서 평생을 몸 담기를 바라나요?"     


원장의 긴 설교가 끝나자 학인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그의 연설은 아직 취직의 환희로 구름 위를 걷던 그를 순식간에 끄집어 내렸다. 하지만 아직 사회초년생의 풋풋한 마음 깊숙한 곳에 단단히 지지대가 되어 줄 만한 훌륭한 충고임은 분명했다. 학인은 이제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원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분명히 상사로서 좋은 사람이었다. 학인은 이 조직에 일원이 된 것이 더없이 자랑스러웠다.


“아이 참! 첫날부터 부담 줘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 조직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 입사했으니 내가 나중에 없더라도… 오늘 들은 말을 일종의 사훈이라 생각하고 반드시 기억해주세요. 그럼 여러분들 덕분에 우리 조직은 퇴보하지 않고 승승장구 발전할 겁니다.”


기합이 들린 네 사람의 대답을 들음과 동시에 사뭇 진지했던 원장의 표정이 풀리면서 다시 미소가 돌아왔다. 그는 목이 말랐는지 식어버린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신 대리, 이제 다음 일정은 뭔가? 인사하러 다니나?"


"네. 이제 부서 돌아다니면서 다른 직원분들한테도 인사드리려고 합니다. 오후에는 OJT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아, 그 신 대리가 작년부터 기획했던 거 말하는 거지? 좋은 변화지만 신 대리가 바쁘겠군.... 여러분, 오늘 긴 잔소리로 고통받은 대신… 점심은 내가 살 테니까 밖에 나가서 비싸고 맛있는 거 먹어요. 신 대리, 이따가 법인카드 가지고 사원들 데리고 같이 밥 좀 먹게나? 오늘 약속 있나?"


"아니요, 없습니다. 안 그래도 제가 사주려고 했었습니다만…."


"크! 역시 신 대리야! 봤죠? 여러분도 여기 신 대리 같이 능력 있고 인성도 훌륭한 선배가 돼야 합니다! 옆에서 잘 배워둬요, 보기 드문 인재니까. 나는 아쉽지만 약속이 있어서 오늘은 결제만 하겠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그래요, 이제 나가서 일들 보세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이런 잔소리하는 날은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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