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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선 Sep 21. 2021

#7. 선택의 기로

직장생활 탄원서



회사에서 개인의 사정이란 지극히 사적인 핑계로 간주될 뿐이다. 국내 대규모 철강회사에 다니던 정윤의 아버지가 어느 날 술에 잔뜩 절어 집으로 돌아와 집안 신경 좀 쓰라는 정윤의 어머니에게 한 말이었다. 그는 홀로 아이들을 챙기고 집안일을 하는 아내에게 항상 미안했다. 적지 않은 돈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가정에 대한 그의 의무가 해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정윤의 아버지는 1년 중 절반은 야근을 했고 주말에도 자주 출근하곤 했다. 입사한 지 20년이 다 돼가는 그는 정윤이 태어날 때와 비교하여 머리숱이 현저히 줄은 데다 옆머리가 하얗게 새었으며 거울에 비친 모습은 생명력을 잃어가는 노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에게 회사는 총칼 없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매년 유능한 후배들이 치고 올라왔고 익숙했던 선배들의 자리가 사라졌다. 조금씩 뒤쳐지는 평범한 가장이 피 튀기는 아수라장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뭐든 필사적이어야만 했다. 상사와 술잔을 기울여 작은 성과 하나라도 더 부풀리고, 더러 동료들의 등에 칼을 꽂아야 할 때도 있었다. 더럽고 비열해도 그렇게 하면 최소한 가정은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조직에 피와 살을 떼어 바칠수록 그의 안에 깃든 영혼은 철강을 녹이는 뜨거운 용광로 곁에서 조금씩 증발했다.


“정민아, 정윤아, 나중에 커서 꼭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아, 알겠지? 그까짓 돈? 조금 못 벌어도 돼. 남들하고 비교하지 말고 마음이 행복하게 사는 게 제일 중요해. 남들과 비슷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살아야 한다.”


그는 소중한 자식들이 자신처럼 타오르는 연옥에서 고문을 겪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면서 두 아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비한 책이 헨리 소로의 <월든(Walden)>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빠의 속마음을 들은 것이 정윤이 막 생리를 시작했을 때에 불과했기 때문에 정윤은 도통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안색이 안 좋은 아빠가 그날따라 힘겨워한다는 사실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그 후로 11년이 지났고, 한 달 전에 입사한 정윤은 이제야 그 의미를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방 책상 아래에 처박아놨던 아빠의 마지막 크리스마스 선물을 찾아 다시 꺼내 놓았다.



신입사원은  일이 없다는 세간의 지론과 달리 정윤은 눈코   없이 바빴다. 그 중에서도 최근 팀이 떠맡게  신규 사업이 말썽이었다. 일자리지원팀은 지방자치단체와 협업으로 추진되는 <아름다운 우리 지역, 기업인 사진 공모전>이란 표제의 정부사업을 떠맡게 되었는데, 본래 마케팅지원팀 일을 욕심만 많은  과장고집을 부린 결과였다.


정윤 . 사진 공모전 사업 들었지? 시랑 하는 거. 추진 계획이랑 예산 어느 정도 들어가는지, 지역에 맡길 수행사 리스트까지 작성해서 오늘까지 나한테 보고해. 나는   있어서 잠깐 나가야 되니까 이따 여덟  반쯤 복귀할 거야. 혹시 모르겠으면 예전 사업들 비슷한 거 있나 한 번 파일 찾아보면서 작성해봐. 이해했지?”


아니나 다를까 한숙자 과장은 퇴근 30분을 남겨놓고 정윤에게 임무을 던져주었다. 6시가 되자 다른 직원들은 상투적인 인사을 건네며 퇴근하기 시작했다.


정윤 씨 바쁘네? 수고해요.”


정윤은 엄마에게 가기로  날이었지만 차마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개인 용무를 꺼내려고  때마다 첫날 복도에서  과장이  말이 저주처럼 떠올랐다. 하지만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윤 역시   편으론 상사의 기대치에 부합하는 유능한 부하직원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혹시라도  과장이 시킨 일을   끝내지 못해서 무능한 직원으로 낙인이 히는 것이 더 두려웠다. 여전히 사정은 알아내지 못했지만 예전에 퇴사했다던  주임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만큼은 사양이었다.

삐딱하게 의자에 앉아 손톱을 깨물던 정윤은   없이 요양보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양보호사는 말도  하는 엄마가 가끔씩 기침을 한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평일에 면회를  간지는 벌써 2주가 넘었다. 주말을 제외하고 최소한  번씩은 가겠다던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정윤은 자신도 모르는 새아빠의 태도를 답습하고 있었다. 어릴  정윤의 아빠는  주가 시작하기 전이면 정윤을 껴안으며 다음 주말에는 반드시 놀이동산에 함께 가자며 새끼손가락을 곤했다. 당연히 아빠는  약속을  번도 지키지 못했고 지금 정윤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가슴이 돌덩이를 지고 있는 것처럼 묵직했다. 책상 위에 펼쳐진 하얀 종이 위로 낡고 퀴퀴한 병실 이불을 덮은 엄마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정윤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벽시계는 6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면회 시간은  10시까지 였고 만약 저녁을 거르고 서둘러 끝낸다면 최소 1시간 정도는 여유가 있을  같았다. 그때부터 정윤은 잡생각을 없애고 해야  일에 집중할  있었다. 그녀는  번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화장실 가는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가급적 물도 마시지 않았다. 인터폰이  울리지 않는  시간 사무실은 고요해서 뭔가에 몰두하기가 수월했다.


마침내 마무리 지어졌을 때는 오후 8 45분경이었다. 15분 전에 도착했어야 할  과장은 아직 복귀 전이었다. 병원까지는 택시로 15 거리였고 9시에 출발한다해도 가까스로 면회가 가능했다. 정윤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미리 자료를 출력하고 코트와 가방챙겨 의자에 걸쳐두었다. 정윤은 사무실 한 가운데를 서성이며  과장이 돌아오기만을 바랬다. 그러나 야속한 그녀의 상사는 9시가 넘어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정윤은 초조해졌다. 다급마음에 전화를 걸었지만  과장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 정윤은 얼마 남지 않은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했다. 리고 곧 결심한 , 출력한 자료를  과장의 책상에 올린 후에 메모지를 남겼다. 노란 메모지에는 정갈한 글씨체로 자료 설명과 먼저 가서 죄송하다는 사과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조속히 사무실을 나서려던 정윤의 검은 눈동자가 번민으로 흔들렸고, 불안한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까지 투명한 회의실 벽을 통해 보이던 글로벌통상팀 역시 어느새  비어 짙은 어둠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연스레 형광등 스위치를 향하던 그녀의 손가락이 잠시 허공에서 춤을 추다가 발을 딛지 못하고 도로 멀어졌다.


‘아까 한 과장님이 분명 돌아온다고 하셨으니까...’


정윤은 하려던 일을 멈추고 손을 거두었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 빠르게 건물을 빠져나갔다. 냉랭한 밤공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맞이했다. 옷 사이사이 벌어진 틈새로 차가운 바람이 침투하면서 몸이 부르르 떨렸다. 때 마침 앞을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 세웠다. 정윤은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아저씨, 몸사랑 요양병원으로 가주세요. 조금 빨리 가 주실 수 있나요?”


“예.”


택시기사의 무심한 대답과 동시에 차가 발진했다. 관성에 의해 정윤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여전히 불안한 그녀의 시선이 멀어지는 회사 건물을 곁눈질했다. 최근에 내렸던 눈으로 얼룩진 외부 통창을 통해 4 일자리지원팀의 사무실 조명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윤은 마치 떨어지는 광체에 홀린 사람처럼 그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어깨가 움츠려지는 추운 날씨에도 <갓파더>의 테이블은 손님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지인의 추천으로, 또는 소셜미디어 상의 우연한 게시물을 통해 도심에서 3.5km나 떨어졌으며 몇 년 전까지 버려져있었던 교회 건물을 찾았다. 주차장에 도착한 대부분의 방문객들이 건물의 주재료가 붉은 벽돌인 허름한 외관에 반신반의하며 묵직한 통나무 문을 밀었다. 그리고 바깥 냉기를 덥혀주는 훈훈한 온기만큼이나 따뜻함을 주는 북유럽 풍의 인테리어를 확인하고서야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었다.


<갓파더>에서는 늘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손님들은 대부분이 분위기를 내려는 커플들이나 회식하는 직장인들이었는데, 일반 술집에 비해 다소 가격이 비싼 술과 안주를 먹기에는 법인카드만큼 좋은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갓파더>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4성급 호텔 건물이 축조 중에 있었다. 진성은 운이 좋았다. 처음 오픈할 때까지만 해도 예상치 못했던 입지적 요행이었다. 이제 주말이면 고정적으로 예약 문의가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주방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구석 자리만큼은 늘 비워두었다. 경영적인 관점에서는 정말 비효율적인 짓이었는데 이는 평소 의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개인적 신념과 연관이 있었다. 진성은 혹시라도 친구들이 자신의 가게에 불시에 찾아왔을 때 헛걸음하지 않도록 특별한 자리를 마련해두고 싶어 했다. 그리고 오늘,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음에 뿌듯해했다. 바로 친구인 학인 커플이 별다른 귀 뜸 없이 찾아온 것이었다.


“회사는 적응했어?”


유정의 물음에 학인은 말없이 위스키 잔 끝을 잡고 휘이휘이 돌리길 반복했다. 진성이 가르쳐 준 스월링으로 그렇게 하면 잔 안에서 위스키 향이 더욱 풍성해졌다. 휘젓던 손목을 멈추고 소용돌이치는 진갈색 액체로 코를 박자 알싸한 오크 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아직 적응 중이지 뭐….”


“그래. 이제 그래 봤자 한 달인데. 아직 정신없고 어리바리할 때지. 가만 생각해보니까 취준생일 때가 좋았다 싶지?”


유정이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위로하며 웃었다.


두 사람은 대학교 때 만나서 벌써 햇수로만 7년째 연애 중이었다. 나이가 4살이나 더 많은 유정은 휴학 한 번 없이 졸업하자마자 대기업에 취직하면서 벌써 올해 과장 승진을 앞두고 있었다. 하필 유정의 발령지가 수도권 위성도시여서 두 사람은 수년간 장거리 연애를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배려 속에서 각자의 본분에 충실한 끝에 한 번의 헤어짐 없이 원만한 연인 관계를 이어올 수 있었다.


“저번 주에 아빠랑 진짜 오래간만에 통화했거든. 자기 취직한 거 뒤늦게 말씀드리니까 엄청 기뻐하시더라. 안정적인 곳에 잘 됐다고 축하한다고 전해달라고. 그리고…….”


학인이 대답이 없자 유정이 눈치를 살피다 애초에 하고 싶었던 말을 어렵사리 꺼냈다.


“이제 자기 취직도 했으니까 우리 서두르는 게 낫지 않겠냐고 그랬어. 말도 안 되는 소리긴 한데, 당장 6월 초나 중순도 가능한 지 한 번 식장 알아보래. 일사천리로 준비 끝내고 서둘러서 하는 게 좋을 거 같다고. 나도 원래는 빨라야 올 가을 즈음 생각했는데… 자기도 알잖아! 아빠 10월에 퇴직이신 거. 뭔가 퇴직 바로 직전에 청첩장 돌리고 하는 거도 좀 그러신가 봐. 뿌린 게 많으니까 포기하긴 아쉬우실 테고.”


“원래 예전부터 우리 계획이 나 취직하면 결혼하기로 한 거니까,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근데…….


학인 역시 할 말이 있는 듯 잠시 뜸을 들였다.


“현실적으로 아직 내가 저축도 제대로 못한 상황이고, 일단 식장은 고사하고 신혼집 구하려면 돈이 한 두 푼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내년 정도가 적당하지 않아?”


그의 대답은 유정이 기다렸던 대답이 아니었고 순간 그녀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자기가 현실적인 문제 차치하고 온전히 시기에만 동의하면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아빠가 많이는 아니더라도 2억까지는 도와주신다고 했어. 그리고 나도 그동안 성과급 나온 거 거의 안 쓰고 꼬박꼬박 잘 모았단 말이야. 거기에 대출까지 고려하면 우리 결혼 저축 못했어도 충분히 해.”


유정의 언성이 살짝 올라가면서 말 속도가 빨라졌다. 누군가를 설득시키려고 할 때 나오는 그녀의 습관이었다. 학인은 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정의 말을 제대로 듣기 전부터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솔직히, 나 더는 못 기다려! 내 친구들만 봐도 작년에 주희 가면서 나 빼고 이제 다 했다는 거 알잖아! 내년이면 벌써 서른다섯이야. 얼마나 더 기다리게 하려고?”


유정은 단호했다. 깊숙이 파여 주름진 미간이 더 이상의 양보는 없다는 강한 의지를 더했다. 그럼에도 학인은 자신의 여자 친구의 제안에 여전히 이견이 있는 듯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했다.


“자기야.”


한동안 잔을 바라보던 학인이 유정을 불렀다.


“응.”


“나 이직... 할까?”


“뭐? 갑자기 왜?”


뜬금없는 소리에 유정이 차분히 의중을 물었다.


“그냥 좀 회사 분위기나 사람들이 좀 안 맞아서?”


그때, 자리를 가려주는 커튼이 열리면서 하얀 셔츠를 입은 진성이 나타났다. 짧은 머리를 뾰족하게 세운 진성의 머리 아래로 땀이 흐르고 있었다.


“아 진짜 미안! 좀 잘 챙겨줘야 하는데, 웬일로 오늘 단체 손님이 와서 엄청 바쁘네. 역대급이야 누나. 누나가 사람을 모으나 봐. 뭐 필요한 거 없어? 치즈 더 줄까?”


“없어, 없어. 야, 진성아 여기 되게 좋다. 분위기가 무슨 나 런던 여행 갔을 때 우연히 갔던 펍 온 거 같아.”


“아 맞다! 누나 처음이구나. 오픈할 때 화분만 보내줬었지. 그거 아직도 인테리어로 두고 잘 키우고 있어. 누나, 내 가게 평가 좀 해봐, 누나 이런 거 감각 좋잖아.”


진성이 테이블 옆에 삐딱하게 서서 자문을 구했다.


“음 글쎄. 아! 다른 건 괜찮은데… 일단 여기 환기가 너무 안 돼. 겨울이라 히터 틀어 놔서 더 그런 거 같아.”


유정이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불평했다.


“그치? 안 그래도, 카운터 뒤쪽 창문이라도 좀 열어 두려고. 입구 쪽에 있는 창은 그쪽에 앉은 손님들이 춥다고 그래서 열 수가 없어. 젠장! 애초에 여기 경매로 사들일 때, 교회 건물 자체에 창문이 별로 없었거든? 뭔가 느낌 있어 보여서 기존 구조를 많이 살렸더니 그게 치명적인 단점이 될 줄은 몰랐네.”


“서큘레이터나 공기청정기라도 좀 설치해. 나중에 상황 봐서 공사 새로 하던지. 한쪽 벽 허물어서 오픈형으로 만들고 주차장 공간 줄여서 캠핑장 느낌 나는 테라스 만들면 대박일 거 같은데? 나 잠깐 화장실 좀. 가는 김에 차에도 좀 들렀다 올게.”


조언을 하던 유정이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의 빈자리를 진성이 채웠다.


“야, 진학인. 너는 왜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있냐? 누나랑 무슨 문제 있어?”


학인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텅 빈 잔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고 진성은 쾌활했던 친구의 변한 모습이 염려스러웠다.


“아니… 우린 문제없어. 그게 아니고, 그냥 회사가 좀 그래.”


“회사가 왜? 일이 힘드냐? 이제 한 달 좀 넘었잖아?”


진성이 우아하게 위스키 병을 들고 학인의 잔을 채웠다. 학인은 단숨에 잔을 들이켰다. 도수가 높은 뜨거운 위스키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자동으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건 아니고. 차라리 일이 힘들면 괜찮을 거 같은데, 일도 별로 없어. 그냥 몇몇 사람들이… 뭐랄까! 좀  이상해.”


“어떻게 이상한데?”


“아니다, 됐어. 어차피 그 사람들이 보기엔 내가 이상할 수도 있지. 각자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까”


“아 그러니까! 말 빙빙 돌리지 말고 좀 자세히 말해봐. 누가 또라이인지 판단은 내가 할 테니까.”


진성의 재촉에 학인은 못 이기는 척 현재 처한 상황을 털어놓았다.


글로벌통상팀의 분위기는 마치 군대 보다도 더 무거웠다. 팀원들 간의 대화는 거의 단절된 수준이라서 어쩔 때는 하루에 세 마디도 안 하고 퇴근한 적도 있었다. 더 최악인 것은 아무도 정시에 퇴근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6시가 되면 프린터용 선반 위에 다리를 꼬아 올리고 있던 반 팀장은 퇴근할 생각보다는 저녁 메뉴를 먼저 고민했다. 같은 팀의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보니, 막내인 학인 역시 자연스레 그들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반일식 팀장은 어미새였고 직원들은 아기새였다. 제대로 날개를 펴는 법도 배우지 못한 아기새 무리가 홀로 먹이를 찾아 나서겠다고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급하게 처리해야 할 업무가 남은 것도 아니었다. 그 누구도 학인에게 업무를 지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참다못한 학인이 수차례 도와드릴 일이 없느냐고 물었지만, 모두 새장 안의 앵무새처럼 없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더 이상 하루 종일 자리에서 허술한 업무 매뉴얼을 보는 척하는 것도 지겨웠다.


그러다 한 9시는 돼야 반일식 팀장이 긴 하품과 함께 선심 쓰듯 퇴근을 지시했고 그제야 모두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어렵사리 퇴근 후 컴컴해진 거리를 걷던 학인은 너무 바보 같은 현실에 헛웃음이 나왔다. 합리적인 이유 없이 팀장의 퇴근 전에는 부하직원들이 퇴근할 수 없게 하는, 그런 구시대적 사내 문화로 고통받을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진짜 쓰레기네. 선배들이 도와줄 거 없다고 말했다면서? 그럼 다 같이 먼저 퇴근하겠다고 말하고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만약 평일에 약속 있으면 어떡해?”


사정을 들은 진성이 혀를 내두르며 물었다.


“그러면 좋은데 뭔가 그런 분위기가 아니란 말이지. 그런 말을 하면 멈춰 버린 시한폭탄을 내가 건드려서 터트릴 것 같은 느낌이야. 어휴, 내가 그냥 쫄보지 시발! 아무튼 난 그래서 요즘엔 아예 약속을 안 잡아.”


“나야 회사를 안 다녀봐서 잘은 모르지만, 할 일이 없는데 왜 굳이 남아있어야 돼? 다음 주에도 또 그러면 먼저 말해. 약속 있어서 퇴근하겠다고. 선배들이야 당연히 너보다 일이 많으니까 사무실에 밤까지 죽치고 있겠지. 아참, 너 휴가는 썼어? 우리 놀러 가기로 한 거? 이러다 휴가도 못 쓰는 거 아니냐?”


“아니, 그것도 올려야지. 휴가는 이미 인사담당 대리님이 한 달 근무하면 하루 쓸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어. 일단 유정이한텐 자세한 건 말하지 마. 초반부터 별 것도 아닌 걸로 끈기 없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진 않으니까.”


“나 뭐?”


갑자기 유정이 돌아오는 바람에 두 사람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 호기심 넘치는 유정의 눈이 꼭 사슴 눈망울과 흡사했다. 잘록한 허리까지 오는 검은 웨이브 머리에 목을 덮는 폴라티, 줄이 얇은 여성용 금 목걸이와 장식이 화려한 귀걸이. 세련되고 도회적인 이미지를 지닌 유정은 누구에게나 호감일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유정이 돌아오자 이번에는 진성이 할 일이 있다며 다시 밖으로 나갔다.


“자기야, 내가 잠깐 나가서 생각 좀 해봤는데…. 이직 준비, 오케이! 딱 3개월만 더 기다려 볼게. 어떻게 보면 바로 취직됐을 지금이 제일 가능성이 높을 시기니까. 서류 더 내봐.”


유정의 말을 들은 학인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최근 들어 침울한 표정을 벗어나질 못했다.


“대신, 퇴사는 안돼. 다니면서 해. 그리고 만약 안되면 그냥 그 회사 다니면서 바로 결혼 준비하는 거야. 그때는 진짜 선택권이 없어.”


유정은 조건을 달았다. 조금 가혹하게 느껴졌지만 학인은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저 캐묻는 거 없이 일단 자신을 지지해준 여자 친구의 배려가 고마울 뿐이었다.


“그래. 고마워.”     


“그리고 이거.”


유정이 가방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어 테이블에 놓았다. 아주 작은 정육면체 모양의 나무토막이 테이블에서 구르며 둔탁한 소리를 만들었다. 학인은 호기심을 갖고 면이 맨질맨질한 물건을 살폈다. 주사위였다. 일반적인 주사위와는 조금 달랐는데, 다섯 면에는 O가, 나머지 한 면에만 X가 새겨져 있었다.


“거절의 주사위야.”


학인이 여전히 단서를 찾지 못하고 물건의 주인을 바라보자 유정이 학인의 손에서 도로 주사위를 빼앗으며 설명했다.  


“사실 회사에서는 거절할 일이라는 게 거의 없잖아? 특히 이제 입사한 신입사원이 어떻게 선배들의 부탁을 거절을 하겠어. 내 본능이 ‘이건 말도 안 되는 부탁이다! 무조건 거절해야 한다’라는 느낌이 들어도 결국 해야 하는 분위기가 조성이 되니까. 눈치만 보다가 울며 겨자 먹기로 평생 예스맨이 되는 거지. 그래서 나는 신입 때 가끔씩 이걸 썼어. 주사위를 굴려서 O가 나오면 그냥 죽었다 생각하고, 더 생각 없이 그냥 딱 하는 거야! 어차피 할 거였으니까 스트레스받지 말자 이거지. 근데 만약 1/6의 확률로 X가 나왔다? 그럼 그때 부탁만큼은 분명하게 거절하는 거지. 거절의 주사위의 법칙은 영화 쥬만지랑 같아. 일단 던져지면 끝이야. 무조건 따라야만 해. 내가 거절하는 게 아니라, 이 마법의 주사위가 시킨 거야.”


“자기야, 지금 진심… 이지? 진짜로 신입 때 이거를 썼어?”


학인은 유정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미소를 머금고 반문했다.


“진심이지! 목공 클래스 들었을 때 자투리 목재로 만들었어. 이제 자기 줄게, 자기 써. 너무 남발하진 말고  거절의 여지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내 결단력이 부족할 때만. 자기처럼 우유부단한 성격엔 도움이 된다고. 사회생활 선배인 날 믿어! 가끔 거절할 줄 아는 사람이 더 막 대하기 어려운 법이라고.”


유정이 눈웃음을 지으며 도로 학인의 손으로 주사위를 쥐어주었고 학인은 손아귀의 힘을 빼서 슬며시 주사위를 흘렸다. 탁! 탁! 테이블 위에서 두 번을 튀긴 주사위가 팽이처럼 핑그르르 돌다가 O가 새겨진 면을 보이며 움직임을 멈췄다.


“자, 이럴 땐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거야. 쉽지?”


학인은 마침내 예전에 미소를 되찾았고 주사위를 주머니에 넣으며 다른 손으로 위스키 잔을 들어 올렸다. 유정이 이에 응했다. 두 개의 크리스털 잔이 살짝 부딪히면서 나름 청아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아쉽게도 그 소리가 완벽하진 않았다. 서로 합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학인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지만 적어도 유정은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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